6·25 전쟁의 전개 과정 완벽 정리!
발발 배경부터 인천상륙작전, 중국군 참전, 휴전 협정까지
연표·전투별 요약 포함. 한능검·수능 대비 핵심 포인트.
6·25 전쟁의 전개 과정
— 한반도를 뒤흔든 비극, 그리고 극복의 역사
안녕하세요,
쉽게 배우는 한국사입니다 🇰🇷
오늘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사건,
**6·25 전쟁(한국전쟁)**의 전개 과정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이 글은 시험 대비뿐 아니라,
전쟁의 참상과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데도 큰 의미가 있을 거예요.
🧭 1. 전쟁 발발의 배경
📘 (1) 냉전 체제의 형성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자유 진영(미국) vs **공산 진영(소련)**으로 갈라졌습니다.
- 한반도 역시 38선을 경계로 **남한(대한민국)**과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단되었습니다.
정치 체제 | 자유민주주의 (이승만 정부) | 공산주의 (김일성 정부) |
지원국 | 미국 중심 서방 진영 | 소련, 중국 중심 공산 진영 |
수립 시기 | 1948.8.15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48.9.9 북한 정권 수립 |
📍 핵심:
한반도는 냉전의 최전선이었고,
이념 대립이 무력 충돌로 번질 위험이 매우 높았습니다.
📘 (2) 북한의 전쟁 준비
북한은 1949년부터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전쟁을 치밀하게 준비했습니다.
- 소련의 T-34 전차, Yak 전투기 등 최신 무기 지원
- 북한 인민군 약 20만 명으로 군사력 증강
-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단기간 내 통일 가능”을 주장
📍 결정적 요인:
1950년 4월, 스탈린이 남침 허가를 내림으로써 전쟁의 불씨가 붙었습니다.
💥 2. 전쟁의 발발 (1950년 6월 25일)
📅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38선 전역을 따라 기습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을 침범하였습니다.”
— 대한민국 국방부 발표
- 북한군 약 20만 명이 탱크와 포병으로 무차별 공격
- 대한민국 국군은 초기 대응 실패 (전력 열세)
- 서울은 불과 사흘 만인 6월 28일 함락
📍 전쟁 초기 특징
- 북한의 압도적 전력 우세
- 남한의 무기 부족, 미비한 방어선
- 정부와 군의 긴급 후퇴
🔥 3. 낙동강 방어선 형성 (1950년 7~8월)
서울 함락 이후,
대한민국은 부산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았습니다.
📘 (1) 한미연합의 형성
- 7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 결의로
북한 침략을 규탄하고, 유엔군 파병을 결정. - 미국을 비롯한 16개국 전투 지원, 41개국 물자 지원
📍 주요 파병국: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등
📘 (2) 낙동강 전선
- 국군과 유엔군이 부산을 중심으로 최후 방어
- 낙동강 방어선 전투: 8월~9월
(대구, 왜관, 마산 등지에서 치열한 전투)
“우리가 여기서 물러서면 부산은 없다.”
— 백선엽 장군
📍 의의:
- 전면 패퇴를 막아내고 전세 역전의 발판 마련
⚓ 4.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1950년 9월)
📅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 (1) 작전 개요
- 기습 상륙: 인천 해안
- 목표: 서울 탈환 및 북한군 보급선 차단
- 참여: 미 제10군단 + 국군 해병대
📍 결과:
- 서울 수복 (9월 28일)
-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 시작
“이 작전은 20세기 최고의 상륙작전이다.”
— 군사학자 랜덜
🚀 5. 북진과 중국군 참전 (1950년 10~12월)
서울을 되찾은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단행했습니다.
📘 (1) 평양 점령
- 1950년 10월 중순, 국군 제1사단이 평양 입성
- 함흥·흥남까지 진격하며 통일의 꿈이 현실로 보임
📍 그러나...
📘 (2) 중국군(인민지원군)의 개입
- 1950년 10월 말, 중국군 30만 명 참전
-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이 급격히 밀리기 시작
- 혹한과 보급난 속에서 전선 붕괴
📍 대표 전투:
- 장진호 전투 (혹한 속의 미군·중공군 교전)
⚔️ 6. 서울 재함락과 1·4 후퇴 (1951년 1월)
📅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대공세로 서울이 다시 함락됩니다.
→ 국군·유엔군은 한강 이남까지 후퇴 (이른바 1·4 후퇴)
📍 전쟁의 양상 변화:
- 전면전 → 소모전
- 휴전선 부근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 시작
🧱 7. 반격과 휴전 협상 (1951~1953년)
📘 (1) 전선의 안정화
- 1951년 3월,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서울 재탈환
- 이후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고착화됨
📘 (2) 휴전 협상 시작
- 1951년 7월, 개성에서 처음 시작 → 후에 판문점으로 이전
- 주요 쟁점: 포로 송환 문제, 군사분계선 설정
📍 휴전까지 걸린 시간:
약 2년간의 협상과 전투 병행
🕊️ 8. 휴전과 그 이후 (1953년 7월 27일)
📅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 체결
체결 당사자 | 유엔군, 북한, 중국 (대한민국은 서명 안 함) |
휴전선 | 군사분계선 설정 (현재의 DMZ) |
비무장지대 | 폭 4km, 길이 약 248km |
결과 | 전쟁은 ‘정전’ 상태로 유지 (완전 종전 아님) |
📍 피해 규모:
- 사망자 300만 명 이상 (민간인 포함)
- 한반도 전역 파괴, 수많은 이산가족 발생
🧭 9. 전쟁의 결과와 영향
정치 | 분단의 고착화 (38선 → 군사분계선) |
사회 | 전쟁 트라우마, 이산가족 문제 |
경제 | 산업 기반 붕괴, 전후 복구 필요 |
국제 | 냉전 심화, 한미동맹 체결(1953) |
📍 핵심 의미:
6·25 전쟁은
한반도가 이념 대립의 최전선이 된 사건이자,
한국이 이후 경제 발전과 자주 국방을 다짐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 10. 시험 대비 핵심 요약
발발 | 1950.6.25 | 북한 남침, 서울 함락 |
반격 | 1950.9 |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
북진 | 1950.10 | 평양 점령, 중국군 참전 |
후퇴 | 1951.1 | 서울 재함락, 1·4 후퇴 |
재공세 | 1951.3 | 서울 재탈환 |
휴전 | 1953.7.27 | 판문점 휴전 협정 체결 |
⚖️ 11. 역사적 의의
📘 ① 분단의 고착화
→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 유지
📘 ② 국제전의 성격
→ 냉전 시대의 대표적인 ‘대리전’
📘 ③ 민족의 비극
→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눈 전쟁
📘 ④ 경제 재건의 출발점
→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짐
“6·25 전쟁은 비극이었지만,
다시 일어선 대한민국의 의지를 보여준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