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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1904~1905)과 한반도의 운명 | 포츠머스 조약과 대한제국의 비극

 

 

 

러일전쟁(1904~1905)과 한반도의 운명

키워드: 러일전쟁 · 포츠머스 조약 · 대한제국 · 일본 침략

핵심 한 줄 — 러일전쟁은 동아시아 패권 질서를 재편했고,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의 대한정책이 국제적으로 사실상 승인되면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잃고 보호국화의 길로 내몰렸다. 왜 조선은 강대국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었는가를 지정학·제도·외교 3축에서 분석한다.

 

 

1. 전쟁의 배경: ‘대륙 러시아’ vs ‘해양 일본’

1) 만주와 조선, 그리고 ‘전초 기지’ 논리

19세기 말, 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만주 진출을 가속했고,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 확보와 태평양 진출을 국가 전략으로 삼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후 급속한 근대화로 군사·재정을 정비하며 조선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규정했다.

2) 1902 영일동맹과 세력 균형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동맹을 체결했다. 이는 일본이 러시아와 충돌할 경우 국제적 고립을 피하는 외교적 ‘보험’이 되었고, 일본의 공세적 전략을 뒷받침했다.

3) 외교 교섭의 파탄

러·일은 만주와 조선의 세력권을 둘러싸고 협상을 벌였지만, 핵심 이익이 충돌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우월권을,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우위를 고집했고, 결국 1904년 2월 전쟁이 시작되었다.

2. 전개 타임라인: 바다와 육지의 결전

1904

  • 2월 — 일본, 선전포고 없이 여순(포트 아서) 함대를 기습. 개전.
  • 4~9월 — 요동·요하 일대에서 전투 지속, 일본군의 여순 공방전 시작.
  • 8~9월랴오양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후퇴하며 일본의 주도권 강화.

1905

  • 1월 — 여순 함대 붕괴 및 항복. 전세가 일본 쪽으로 기울다.
  • 2~3월봉천(묵덴) 전투에서 일본이 전략적 승리.
  • 5월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발틱 함대를 격파.
  • 9월 — 미국 루스벨트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 체결, 전쟁 종결.
러일전쟁 주요 전장 지도(텍스트 없는 지도형 이미지)
여순·랴오양·봉천(묵덴)·쓰시마 등 주요 전장 위치 개관(예시 이미지).

3. 포츠머스 조약: 일본의 ‘한국 우월권’ 사실상 승인

핵심 조항 요약

  •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적 권익을 인정
  • 남사할린(북위 50도 이남) 일본 할양
  • 랴오둥 반도 조차권 및 남만주철도 등 만주 이권 일본에 승계
  • 양국의 만주 철군 및 중국의 영토 보전 ‘원칙’ 확인

의미

  •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대한정책 정당성 확보
  • 대한제국의 외교적 고립 심화
  • 미·영의 현실주의적 승인 분위기 강화
전쟁은 총성으로 시작됐지만, 조약은 펜끝으로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꿨다.

4. 왜 조선은 강대국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었는가

1) 지정학적 요충지와 ‘완충지대’의 역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잇는 관문이었다. 강대국의 시각에서 조선은 ‘완충지대’ 혹은 ‘교두보’였고, 스스로의 이해보다 타자의 이해가 우선되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2) 제도·재정·군사 역량의 취약

갑오·광무개혁으로 근대화가 진행됐지만, 재정 기반과 현대식 군대·관료 시스템은 여전히 취약했다. 개혁의 성과가 제도적 안정으로 응고되기 전에 외교·안보 위기가 덮쳤다.

3) 외교 연합의 부재

영일동맹, 미·일 간 현실적 합의 분위기 속에서 대한제국은 실효적 동맹·연합을 구축하지 못했다. 국제정치의 ‘합의’는 약소국의 의사를 배제한 채 진행되곤 했다.

4) 내부 정치의 분열

개화·보수, 친러·친일 등 노선 갈등이 심했고, 일관된 국가전략을 설계·집행할 통합 리더십이 약했다. 외세는 이 균열을 파고들었다.

5. 대한제국에 미친 영향: 보호국화의 가속

1) 1904년 한일의정서와 고문정치

개전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과의 협정을 통해 군사적 점령에 준하는 권리를 확보했고, 재정·외교에 일본인 고문을 파견했다. 이는 주권의 ‘내부화된 침탈’을 의미했다.

2)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포츠머스 조약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는 사실상의 보호국화로, 1910년 강제 병합의 직선로가 열렸다.

3) 사회의 대응: 의병과 민족운동

지식인과 민중은 언론·교육·의병 투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합의와 일본의 군사력 앞에서 조직적 항쟁은 한계에 봉착했다.

1905년 전후 한반도의 상황을 상징하는 흑백 사진(텍스트 없는 이미지)
1905년 전후, 한반도의 주권 공간은 급속도로 축소되었다. (예시 이미지)

 

6. 오늘의 교훈: 힘과 제도, 외교의 삼박자

  • 자주성은 제도·재정·군사의 총합 — ‘의지’만으로는 국가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 외교는 현실주의의 무대 — 가치와 더불어 이해의 연합을 설계해야 한다.
  • 내부 통합이 외부 협상의 힘 — 분열된 국가는 협상 테이블에서 쉽게 배제된다.
역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 전략의 교과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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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해양에 떠오르는 함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