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간도참변 (1920) — 피로 쓴 국경의 기억, 잊혀진 대학살

skillplanner80 2025. 8. 1. 06:14

간도참변 (1920) — 피로 쓴 국경의 기억, 잊혀진 대학살

 

일제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학살당하는 조선인


1. 봉오동·청산리의 영광 뒤에 가려진 비극

1920년, 독립운동의 기운이 만주와 간도를 뒤덮고 있었다.
그해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을 물리쳤고,
10월에는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가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조선 민중은 환호했고, 일제는 분노했다.

일본은 이 ‘굴욕’을 절대 그냥 넘기지 않았다.
그 보복은 무장 독립군이 아닌 민간인을 향했다.

그해 겨울, 일본군은 만주 간도 지역에 대대적인 보복작전을 감행했고,
이는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간도참변(間島慘變)**이라는 이름의 비극으로 남았다.

이 글은 영웅의 전투 뒤에 가려진
이름 없는 사람들의 학살을 기억하고자 한다.


2. 배경 — 북간도와 조선인의 이주

간도는 오늘날의 중국 길림성,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국경지대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조선인들은 가뭄, 착취, 신분제를 피해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처음엔 농업이 주 목적이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로는
일본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이 지역엔 수많은 독립군 부대와 민족학교, 교회, 야학이 생겼고,
조선인들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자치적 삶을 꾸려갔다.

하지만 이 조용한 거점은
1920년 두 전투 이후 일본의 복수 대상이 된다.


3. 작전명 '경신참변' — 보복의 이름으로 시작된 학살

일본군은 1920년 10월 23일부터 12월 말까지
북간도 지역에 7000명 이상의 병력을 투입
소위 ‘토벌작전’을 실시했다.

하지만 이 작전의 실제 목적은
독립군 색출이 아닌 조선 민간인 말살이었다.

  • 마을 단위로 불태움
  • 남성은 독립군 연계 혐의로 총살
  • 여성과 아이도 고문 후 화형 또는 생매장
  • 교회·학교·민가·무덤까지 전소

일본군은 마을을 포위한 후
일제히 사격, 이어서 방화, 강간, 고문
모든 수단을 동원해 간도 지역 조선인들을 짓밟았다.


4. 구체적 사례 — 학살의 현장

대표적인 학살 지역은 다음과 같다.

  • 화룡현 용정촌: 118명 집단 사살, 교회 방화
  • 왕청현 명월구: 200명 이상 피살, 어린이 생매장
  • 훈춘현 대황구: 주민 전원 피살, 마을 지도 불태움
  • 도문현 동창자: 임산부 포함 70여 명 총살, 시신 훼손

심지어 중국인 마을도 일본군에 의해 공격당하며
간도 지역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일제는 이를 ‘독립군 협조자 색출’이라 주장했지만
그 실상은 무방비 민간인에 대한 보복 학살에 지나지 않았다.


5. 피해 규모와 실태

간도참변 당시 정확한 사망자 수는
일제의 철저한 기록 통제로 인해 아직도 확정되지 않았지만
최소 수천 명, 많게는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 남성은 '불령선인 혐의자'로 분류되어 처형
  • 여성은 고문과 성폭행, 이후 화형
  • 아이들은 집과 함께 불탐
  • 마을 전체가 지도에서 사라진 사례 다수

뿐만 아니라

  • 곡식 저장고, 양식, 가축 약탈
  • 민족학교 교사 및 학생 납치 또는 암살
  • 독립운동가 가족에 대한 공개 총살

이로 인해 북간도의 조선인 공동체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살아남은 이들도
압록강을 건너 조선 본토로 강제 이주하게 된다.


6. 국제사회의 반응과 기록

이 사건은 중국 언론과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일부 알려졌다.

  •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스는
    “내가 본 가장 체계적이고 잔혹한 학살이었다”고 증언
  • 상해 임시정부는 외신을 통해
    간도참변의 진상을 알리고 국제조사를 촉구
  • 조선일보·동아일보는 제한적으로 보도했으나,
    이내 총독부 검열에 의해 삭제·발행정지

결국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언급되지 않는 조선 최대의 학살 중 하나가 된다.


7. 간도참변이 남긴 것

  • 북간도 독립운동의 일시적 붕괴
  • 민간인 학살이라는 전쟁 범죄
  • 조선 민중의 기억 속에 새겨진 트라우마
  • 일본 제국주의의 본질을 민중이 체험한 순간

무엇보다 간도참변은
조선의 독립운동이 단지 정치적 투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민중의 전쟁
이었음을 보여준다.


8. 마무리 — 잊히지 말아야 할 이름 없는 희생자들

간도참변은
연설도 없었고, 선언문도 없었다.
단지 누군가의 집에 불이 났고,
어린아이가 울다 사라졌고,
어머니가 아들을 안은 채 총을 맞았다.

그들의 이름은 남지 않았고,
그들의 무덤도 없지만,
그들의 죽음은
조선이라는 이름이 지켜야 했던 또 하나의 이유였다.

오늘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다시 부른다.
비록 몰라도,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