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경북 안동 청년동맹 집회 탄압 사건 (1931)— 일제의 탄압 속에서 피어난 청년 항일의 불씨

skillplanner80 2025. 8. 11. 04:08

경북 안동 청년동맹 집회 탄압 사건 (1931)

— 일제의 탄압 속에서 피어난 청년 항일의 불씨

1. 서론 – 역사의 변방이 아닌 중심, 안동

1931년 3월, 경상북도 안동은 평소와 다름없는 봄날 같았지만, 그 이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지역은 전통 유학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상과 민족의식이 퍼져나가는 장이었다. 바로 이곳에서 청년들이 주도하는 대규모 항일 집회가 계획되고 있었고, 이는 곧 ‘경북 안동 청년동맹 집회 탄압 사건’으로 기록될 역사적 장면으로 이어졌다.

안동은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으며, 청년층은 지역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핵심 세력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좌시하지 않았고, 강력한 탄압을 통해 불씨를 꺼뜨리려 했다.


2. 시대적 배경 – 1930년대 조선의 청년운동

1930년대 초반 조선은 경제·정치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농촌 경제가 파탄나고, 농민들은 고리채와 세금 부담에 시달렸다.
  • 청년층은 학문과 사상에 눈을 뜨면서 사회 변화와 민족 해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 전국적으로 청년동맹, 학생자치회, 노농운동단체 등이 활발히 결성되었다.

안동 역시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안동 청년동맹은 문화 강연회, 야학 운영, 농민 계몽 운동 등을 펼치며 지역 사회에서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 입장에서 이는 ‘치안유지법’의 적용 대상이 될 위험 요소였다.

경북 안동 청년동맹 집회 탄압 사건 (1931)


3. 청년동맹의 형성 및 활동

안동 청년동맹은 주로 20대 초·중반 청년들로 구성되었으며, 회원의 상당수가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지식층이었다.

  • 목표: 민족의식 고취, 문맹 퇴치, 경제적 자립 운동
  • 활동: 무료 야학 운영, 항일 강연회, 독서회, 연극 공연 등을 통한 계몽
  • 비밀활동: 독립운동 자금 모금, 항일 전단 배포,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

이들은 ‘민족 해방’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진 않았지만, 모든 활동의 밑바탕에는 조선인의 권익 회복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발심이 깔려 있었다.


4. 1931년 3월 집회 준비

1931년 초, 안동 청년동맹은 대규모 강연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표면상으로는 ‘농촌 경제 부흥과 청년의 역할’을 주제로 한 문화 집회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고 민족 자존을 강조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었다.

연사로는

  • 경성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 출신 청년,
  • 안동 지역에서 존경받던 기독교 지도자,
  • 해외 독립운동 경험이 있는 인물
    등이 초청되었다.

이 소식은 빠르게 지역사회에 퍼졌고, 집회 당일에는 안동뿐 아니라 인근 의성, 예천, 영주 등지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5. 일제 경찰의 사전 탐지

안동경찰서는 이 집회가 ‘반국가적 사상’을 전파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사전 조사에 착수했다.

  • 밀정을 동원해 회의 내용을 도청
  • 강연 초청 인사의 신원 파악
  • 집회 장소 주변에 사복경찰 배치

집회 하루 전날, 일본 경찰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보고서를 올려 ‘즉각 해산 조치’ 방침을 승인받았다.


6. 집회 당일 – 탄압의 순간

1931년 3월 15일 오후, 안동 시내 한 교회 강당에서 집회가 열렸다. 300명 이상이 참석한 가운데, 첫 연설은 ‘청년의 자주정신’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연사가 ‘조선 민족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발언을 시작하자, 경찰이 강당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 경찰의 행위: 연단 점거, 연사 체포, 참가자 색출
  • 청년들의 대응: “우리는 강연을 듣고 있을 뿐”이라며 항의, 일부는 구호를 외치며 저항
  • 결과: 현장에서 25명 체포, 주요 인물 7명 구속, 나머지 참가자들도 경찰서로 연행 후 심문

체포된 청년들은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일부는 ‘사상범’으로 분류돼 장기간 수감되었다.


7. 재판과 판결

재판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진행됐다.

  • 주동자 3명: 징역 3년
  • 연설자 2명: 징역 2년
  • 나머지 2명: 징역 1년 6개월
    나머지 체포자들은 훈방되었지만, ‘사상범 예비명부’에 기록되어 이후 취업과 사회생활에 심각한 불이익을 받았다.

8. 사건 이후의 파장

이 사건은 안동뿐 아니라 경북 전역의 청년운동에 큰 충격을 주었다.

  1. 조직 해체 – 안동 청년동맹은 지도부 공백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
  2. 사상 탄압 심화 – 경찰은 모든 청년회·학생회 활동을 철저히 감시했다.
  3. 항일 의식의 확산 – 역설적으로, 이 사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면서 다른 지역 청년들에게 저항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9. 역사적 의의

  • 지역 청년운동의 성장: 지방 청년들이 단순히 문화·체육 활동을 넘어서 사회변혁과 민족 독립을 목표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 일제의 두려움: 지방 소규모 집회조차 강력히 제압한 것은, 청년운동이 가진 폭발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항일정신의 전승: 사건 이후 많은 청년들이 해외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0. 오늘날의 시사점

이 사건은 청년들이 시대적 부름에 응답했던 역사적 사례다. 오늘날에도 사회 변화의 중심에는 젊은 세대가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 인권은 결코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과 용기 위에서 세워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