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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과서 항의 사건 (1939)― 식민지 조선의 여성 의학도들이 보여준 지성의 저항

skillplanner80 2025. 8. 10. 01:32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과서 항의 사건 (1939)

― 식민지 조선의 여성 의학도들이 보여준 지성의 저항


1. 들어가며: 역사에 묻힌 여성의 외침

일제강점기, 조선의 수많은 항일운동은 남성 중심의 무장투쟁이나 노동운동에 집중되어 조명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펜을 들고, 교실 안에서 조용히 그리고 단호하게 저항한 여성 지식인들의 움직임도 분명히 존재했다.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조선인 여학생들이 벌인 교과서 항의 사건은 바로 그러한 지식 기반 항일의 상징적 사례다.

이 사건은 천황 숭배와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제하는 일제의 교과서 개정 정책에 맞서, 조선 여성 의학생들이 교육 현장에서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행동에 나섰던 보기 드문 사례이다. 당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조선 유일의 여성 전문 의학교육기관으로, 그곳에 재학 중이던 여성들은 단순한 지식 수용자가 아닌 ‘교육의 주체’로 자신들을 인식하고 있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과서 항의사건


2. 시대 배경: 지식의 정치화와 황국신민화 교육

1930년대 후반, 일제는 중일전쟁(1937년 발발) 이후 조선을 전시 체제에 본격적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황국신민화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는 단지 정치적·군사적 동원이 아닌, 정신적·문화적 동화 정책까지 아우르는 철저한 식민 동화 전략이었다. 그 중심에 교육 제도와 교과서 개정이 있었다.

일제는 조선의 초중등 교육뿐 아니라 고등 교육기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교의 교과서에 천황에 대한 충성, 일본의 ‘선진성’ 찬양, 식민 지배의 정당화 내용을 삽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의학 분야에서도 ‘공공 위생’이나 ‘국민보건’이라는 명목 하에, 일본제국의 위생정책과 천황 중심의 통치 이념이 은근히 녹아들어갔다. 이는 의학교육의 전문성과 진리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다.


3. 학교 소개: 조선 유일의 여성 의학 교육기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1928년 설립되어 여성 의사 양성을 목표로 운영된 조선 유일의 여성 전문 의학교육기관이었다. 당시 의사 자격을 갖춘 여성은 극히 드물었고, 이 학교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독립적 생계 기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곳의 조선인 여학생들은 사회의식과 학문적 자각이 뛰어났으며, 학교 교육 외에도 신간회, 형평사 등 지식인 네트워크와 연계된 교양 활동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단순히 암기식 수업에 그치지 않고, 의학 지식의 윤리적 기반, 환자와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토론하며, 지식인으로서의 자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4. 사건의 발단: 교과서 개정 강제

1939년 4월경, 학교 측은 일본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병리학, 해부학, 공중보건학 등의 교과서에서 기존에 사용되던 영문·한문 교재를 폐기하고, 일본어로 작성된 ‘천황 숭배형’ 교재로 대체하겠다는 방침을 전달했다. 새로 배포된 교과서에는 의학 이론보다는 '천황 폐하의 은덕', '국민의 충성', '건강한 신민 양성'이라는 정치적 내용이 강조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공중보건 교재에는 “국민보건은 천황 폐하의 은총에 따라 실현되는 바, 황국의 신민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까지도 강건해야 하며…”라는 식의 서문이 삽입되어 있었고, 병리학 교과서에는 전염병 통제를 통해 ‘황국의 질서와 영광’을 구현한다는 취지의 사례가 기술되었다.

이를 접한 학생들은 크게 분노했다. 단순한 실기 위주의 기술 교육조차 아니고, 이념 주입을 앞세운 교재가 의학 교육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5. 항의의 조직화: 침묵 속에서 조직된 지성의 저항

이러한 교과서 변경에 반발한 2~3학년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비공식 모임이 결성되었다. ‘의학교육 본연 회복 모임’이라는 비공식 명칭 하에, 이들은 수차례 비밀 회합을 가지며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총 30여 명의 여학생들이 연대하여 항의문 작성을 결의했고, 주요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1. 교과서 개정 중단 및 기존 교재 복구
  2. 교과서 내용의 학문적 기준 강화
  3. 의학 수업에 정치·이념적 내용 삽입 금지
  4. 교수진의 자율적 강의 권한 보장

이들은 1939년 6월 14일, 교수진과 교무처에 항의서를 전달했다. 교내 게시판에는 “의학은 진리를 배우는 곳이지 정치 이념을 수용하는 곳이 아니다”라는 문구가 익명으로 붙기도 했다.


6. 당국의 반응: ‘불온분자 색출’과 사상조사

항의 서한이 접수되자, 학교 측은 처음엔 조용히 사태를 덮으려 했다. 그러나 총독부 학무국의 보고 체계로 내용이 전달되면서 문제는 커졌다. 곧장 경성부 경찰서 특별고등과가 학교에 출동해, 항의 주동자 색출에 들어갔다. 당시 항의문을 돌렸던 3명의 학생은 퇴학 처리되고, 나머지 항의 참여자는 ‘근신 및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해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상 조서’를 작성하고, 가족 배경과 과거 행적, 독서 이력까지 조사한 것이다. 일제는 여성 지식인들이 일으킨 이 사건을 단순한 교육 불복종이 아닌 '사상적 불온행위'로 간주했다.

이로 인해 일부 여학생은 졸업 후 면허 취득 과정에서 일본 당국의 견제를 받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이후 조선총독부 직영 병원이나 일제계 위생기관에 취직이 불허되었다.


7. 조선 지식인 사회의 반응과 연대

이 사건은 여성 교육기관 내 소규모 저항이었으나, 조선 내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는 조용한 연대를 표했다. 당시 '조선지식인협회' 내 일부 인사는 “의학은 생명의 가치를 지키는 학문이니, 천황의 권위를 덧씌우는 것은 살인의 방조”라고 언급했다.

또한, 잡지 『동광』, 『신여성』 등에서도 이 사건을 에둘러 언급한 글이 게재되며, 당시 여성 지식인의 자각과 주체적 움직임을 응원했다.


8. 사건의 의의: 식민 교육 체제에 맞선 여성 주체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과서 항의 사건은 단순히 학교 안의 문제를 넘어, 다음과 같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 여성 지식인의 주체적 저항: 여학생들이 지식 수용자가 아니라 생산자, 해석자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한 대표적 사건
  • 식민 교육 체제의 문제점 폭로: 정치 이념의 무분별한 삽입이 교육의 질을 어떻게 훼손하는지를 보여줌
  • 지식 기반의 항일운동: 무력이나 시위가 아닌, 논리와 문서로 대응한 새로운 방식의 항일운동

이 사건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훗날 조선 해방 이후 여성 교육의 중요성과 학문 자율성 논의에서 중요한 전거(典據)로 작용했다.


9. 마무리하며: 그들은 의사이기 전에 인간이었다

교과서 항의 사건에 참여한 여학생들은 대부분 이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의 조용한 외침은 현재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의학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학문이다.
그러나 그 생명이 정치 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때,
침묵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은 단순한 ‘행위’가 아닌 ‘의무’에 가깝다.

1939년 경성의 교실 한구석에서,
여학생들이 보여준 그 의무감과 자존감은
오늘날 우리 교육이 지녀야 할 본질을 다시금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