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을 휩쓴 죽음의 파도-1920년대 콜레라 대폭발과 식민지의 민중
경성을 휩쓴 죽음의 파도
1920년대 콜레라 대폭발과 식민지의 민중
“저 집도, 이 집도… 콜레라가 또 한 명을 데려갔다더라”
1920년대 중반, 경성(서울) 성곽 안.
고요한 밤, 어느 골목에선 또다시 초상이 치러집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오늘 아침이면…”
속절없이 퍼지는 전염병 소문에
사람들은 문을 꼭 닫고,
가족끼리 모여
불안한 밤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 불안도
곧 일상이 되었습니다.
죽음이 밀려온 도시, 경성
1920년대 경성은
수많은 조선인과 일본인,
시장, 전차, 공장, 신문사, 학교가 모여
조선의 새로운 중심처럼 보이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급격한 인구 증가와
식민지 도시화의 그림자 속에
상하수도, 위생, 공중보건 시스템은
터무니없이 낙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여름,
불길한 소문이 번졌습니다.
“콜레라가 터졌다.”
콜레라, 도시를 휩쓸다
처음엔 한두 명이
고열과 구토, 설사로 쓰러졌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동네마다, 시장마다
환자와 시신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 하룻밤 사이에 한 골목에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고, - 시체가 이송되지 못해
길거리에 방치되기 일쑤였으며, - “물만 마셔도 죽는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밤이면 장례 치르는 집에서
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 1922년 경성 주민 구술
일제의 대응, 조선인의 절망
일제 당국은
최초 발생 초기엔
사실을 은폐하거나
“별 것 아니다”라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염자는
일본인, 조선인, 부유층, 빈민층
가릴 것 없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식민지 정부는
뒤늦게 방역령을 내렸으나,
- 상수도는 이미 오염
- 시장·하천엔 오물과 쓰레기
- 공공의료는 일본인 위주
- 조선인 빈민가는
방치나 다름없었습니다.
병든 도시, 무력한 민중
환자가 생긴 집은
아예 격리되어
문이 봉인되고,
환자와 가족들은
의료 지원 없이
스스로를 지켜야 했습니다.
- 구호소는 인력 부족,
- 치료약도 제대로 없고
- 의료진은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부유층 위주로만 파견되었습니다.
가난한 조선인들은
“누가 병에 걸리면
남은 가족까지 굶거나
같이 죽을 수도 있다”며
서로를 피하고,
때로는 이웃이 쓰러져도
두려움에 시신조차 치우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가 병에 들었지만,
약도, 의사도, 아무것도 구할 수 없었다.”
― 당시 경성 빈민가 소년의 회상
콜레라 대유행의 정점
1920년대 중반,
경성은 ‘죽음의 도시’라 불릴 만큼
사망자가 폭증했습니다.
일제 정부의 공식 통계에도
수천 명의 조선인이 희생되었다고 남아 있지만,
실제론
수 만 명에 달하는 목숨이
기록도 없이 사라졌다는 증언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시장, 학교, 공장, 심지어 관공서까지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고
심지어 일본인 당국자조차
“경성 시내 방역 실패”를 시인했다는
신문 기사도 있었습니다.
전염병 속의 민중, 그리고 연대
그 와중에도
가난한 이웃끼리
음식과 약초를 나누거나,
한글로 된 ‘민간 방역 지침서’가
몰래 돌려보아지기도 했습니다.
- 여성들은
우물에 숯과 소금을 넣고
아이들에게 끓인 물만 먹였으며, - 청년들은
동네 공동 우물 청소에 나섰고, - 교회와 사찰, 민간단체들은
무료 급식·간이 진료소를 열기도 했습니다.
“의사와 약이 없어도
서로를 지켜주는 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 한인 자원봉사자 구술
도시 빈민, 가장 큰 희생자
특히
경성 변두리와 빈민가
판잣집, 지하실, 뒷골목 등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죽었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지원도,
제대로 된 의료조차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전염의 근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의해 쫓기거나
강제 격리에 시달렸습니다.
신문이 전한 참상과 책임론
“경성 시내 콜레라 사망자 연일 증가”
“경찰 방역 실패, 조선인만 피해 커”
(1924년 조선일보·동아일보 기사)
신문과 잡지에는
일제 당국의 무책임,
공공의료의 불평등,
도시 빈곤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습니다.
일부 일본인 의사조차
“경성의 위생은 조선인 탓이 아니라
식민지 행정의 무관심 때문”이라며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는
기사도 남아 있습니다.
이후의 변화와 남은 상처
콜레라 참사가 끝난 뒤에도
많은 조선인은
가족과 이웃을 잃은
상실감,
그리고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는
배신감을 오래도록 안고 살았습니다.
이 사건은
경성 시민들의
보건·위생 운동,
민간 의료 지원,
청년·여성 중심의 자원봉사 활동 등
자생적 사회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성 콜레라 대폭발 사건은
단순한 전염병의 역사가 아닙니다.
- 식민지 현실과 보건 불평등
- 권력의 무책임과 민중의 고통
- 두려움 속에서도 서로를 지켜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용기
이 모든 것이
그 한 해,
경성 골목에서 살아낸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도시를 덮었지만
우리는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다.”― 1920년대 콜레라 생존자 증언
참고자료
- 서울역사편찬원 ‘경성의 전염병과 보건사’
- 조선일보·동아일보(1920~25) 기사
- 독립기념관 구술·생활사
- 현대 감염병사 연구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