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맹퇴치운동 탄압 사건 —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 금지된 자유의 이름
문맹퇴치운동 탄압 사건 —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 금지된 자유의 이름
1. 글을 안다는 것,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의미
문자를 알고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오늘날엔 너무 당연한 권리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는 이 ‘문자 해득 능력’조차도 통제의 대상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했다.
이는 조선 민중이 현실을 인식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갖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민간 주도의 문맹퇴치운동, 일명 **야학(夜學)**은 전국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조용한 밤, 등잔불 아래 시작되었지만,
그 결말은 체포, 고문, 투옥, 그리고 침묵이었다.
조선인의 ‘글을 알 권리’를 요구했던 이 평범한 운동은,
일제에 의해 ‘사상범 양성소’로 낙인찍히며 잔혹하게 탄압받았다.
2. 야학 운동의 시작 — 글 모르는 민중이 깨어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 곳곳에서는
학생, 교사, 지식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야학을 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농민과 노동자가 낮에는 일을 해야 하므로, 수업은 밤에,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
야학은 단지 문자만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 기본적인 한글 해득
- 조선의 역사, 독립운동가 이야기
- 노동법, 소작료 개념 등 생존에 필요한 상식
- 근대 시민의식과 사회 비판 교육
이런 야학은 순식간에 확산되었고,
경성, 평양, 진주, 군산, 해주, 원산, 청진, 대구 등 전국 각지에서
수백 개의 야학이 생겨났다.
3. 일제의 인식 — “야학은 불온사상의 온상”
처음엔 일제도 야학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야학 수강생이 늘고,
수업 내용이 단순한 문해를 넘어 ‘역사, 권리, 해방’ 등으로 확장되면서
조선총독부는 점점 이를 치안유지법 위반 가능성이 있는 활동으로 간주하게 된다.
결국 1930년대 초반부터 야학 단속이 시작됐다.
- 교사·운영자 구속
- 수업 교재 몰수
- 고발자에게 포상금 지급
- 학생 명단 확보 후 부모 협박
특히 1933년 노동야학 탄압사건과 같은 조직적 단속 이후
야학 교사들은 대부분 ‘불령선인’으로 분류되었고,
야학 수업을 받는 것조차 ‘사상오염’ 혐의가 붙는 시대가 도래했다.
4. 야학 교사들의 처지 — 열정과 희생 사이에서
야학을 이끈 이들은 대부분
- 대학생
- 기독교 청년
- 폐교된 민족학교 출신 교사
- 직업 없이 동네에서 존경받던 선비
들이었다.
그들은 돈을 받지 않았고, 자신도 궁핍했지만,
글을 가르치는 일이 민족을 깨우는 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일제의 검거가 시작되면서
이들 다수는 고문과 투옥을 겪었고,
야학을 하던 사실 자체가 향후 감시 명단 평생 등재로 이어졌다.
5. 대표 사례 — 황해도 해주의 '신흥야학 사건'
1936년, 황해도 해주에서는 신흥야학이라는 작은 야학에서
- 민중 계몽 자료
- 3.1운동 회고문
- 일장기 파기 그림
등이 발견되며, 일제가 ‘반역 혐의’를 적용해
운영자 3명, 수강생 7명을 구속하고
신흥야학 관련 자료 300여 건을 불태웠다.
그중 한 수강생은 14세였으며,
“3.1절이 뭐냐”는 질문에 “독립의 날입니다”라고 답한 것이 문제가 되어
‘치안 방해 사상 발언’으로 취조를 받았다.
이 사건은 야학이 단지 문자 교육의 장이 아니라,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거점임을 일제 스스로 입증한 셈이었다.
6. 왜 글자를 두려워했는가?
일제가 야학을 탄압한 본질적 이유는 ‘글’ 그 자체였다.
- 글을 안다는 것은 사유의 시작
- 글을 안다는 것은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능력
- 글을 안다는 것은 저항할 수 있는 무기
즉, 문맹퇴치운동은 무장투쟁도, 시위도 아니었지만
그 잠재력은 어떤 투쟁보다도 무서운 것이었다.
특히 한글은 조선 민중의 언어였기에
일제는 조선어 교육 자체를 점차 금지했고,
야학은 **‘언어를 지키는 저항’**으로 변모하였다.
7.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1930년대 후반 이후, 대부분의 야학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 밀실 수업
- 이동 야학
- 종교 기관을 위장한 학당
- 한글 교재를 숨긴 성경책, 잡지
이처럼 조선인은 글 하나를 배우기 위해 도망다니며 공부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무명 교사’, ‘밤의 선생님’들이 사라져 갔다.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은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날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다.
8. 맺음말 — 문맹퇴치는 저항이었다
문맹퇴치운동은 폭탄을 던진 것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운동은 조선 민중이 일제의 통제 구조를 근본에서 흔든 시도였다.
글을 가르치는 일,
글을 배우는 일,
그 단순한 행위가 이토록 거대하고,
이토록 처절했던 시대.
우리는 오늘 그 사실을 잊고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