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밤의 학교, 자유의 외침― 배재학당 학생들이 숨긴 독립선언문의 밤

skillplanner80 2025. 7. 25. 03:30

밤의 학교, 자유의 외침

― 배재학당 학생들이 숨긴 독립선언문의 밤

 

밤, 교실에서 선언문을 나누는 배재학당 학생들


“우리끼리라도, 조선의 내일을 쓰자.”

1919년 3월, 서울 정동 배재학당.
밤이 깊어지면 교실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옵니다.
“오늘 밤, 꼭 전해주기로 한 곳이 몇 군데더라?”
“교문 밖 경찰의 눈만 피하면 돼.”

교실 맨 뒤,
책상에 둘러앉은 몇 명의 학생과
문서 꾸러미를 손에 든 선배.
긴장과 기대,
두려움과 떨림이 뒤섞인 눈빛이 오갑니다.

“지금이 아니면, 우리도 평생 후회할 거야.”
한 친구의 속삭임이
방 안의 공기를 바꿉니다.


3·1운동과 배재학당의 젊은이들

1919년,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던 그해 봄,
서울 정동의 배재학당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 학교엔
근대 교육, 자주독립, 자유의 가치에
열정적인 청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 외국인 선교사가 가르치던 영어, 역사,
  • 학생들끼리 밤마다 돌려보는
    독립운동 신문과 격문,
  • “조선이란 무엇인가”를
    밤새 토론하는 모임이
    골목마다 번졌습니다.

독립선언문, 학교 담장 넘어 퍼지다

1919년 3월의 어느 밤,
선배가 나직하게 입을 엽니다.

“오늘, ‘독립선언서’ 인쇄본이
교외에서 몰래 들어왔다.
내일 새벽, 우리가
경성 시내와 학교 주변에 뿌려야 한다.”

학생들은 숨을 죽입니다.
어느덧 10여 명이 모여
작업을 분담합니다.

  • 누군가는 선언문을 조심스레 잘라
    여러 묶음으로 나누고
  • 누군가는
    “이 문서의 출처는 학교가 아니다”는
    메모를 붙입니다.

여학생, 남학생, 심지어 외국인 교사까지
작은 도움의 손길이
이어집니다.


“내일 새벽, 기적처럼…”

그날 밤,
몇몇 학생은 선언문 꾸러미를
교복 소매와 책가방,
교실 책상 속,
기숙사 이불 밑에 숨깁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아침에, 학교 뒷문으로 흩어지자.”
“이건 모두 우리의 책임이야.”
각오를 다집니다.

새벽이 밝기 전,
배재학당 담장을 넘어
학생들은 각자
경성 시내 시장, 정동길,
성문, 전차 정류장 등에
선언문을 슬그머니 흩어놓고
슬며시 학교로 돌아옵니다.


일제 경찰의 단속과 학교 안의 공포

하지만
아침이 밝자마자
경성 시내에는
“독립선언문이 다시 돌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합니다.

일제 경찰은
곧장 배재학당을 포함한
정동 일대 학교들에
급습을 시작합니다.

  • 학생들 교복과 가방을 수색
  • 교실·기숙사 책상과 침상을 샅샅이 뒤짐
  • 교사, 외국인 선교사까지
    모두 불러 신문

학교 안은
숨죽인 공포로 가득 찹니다.

“경찰이 교문을 봉쇄하고
학생을 한 명씩 불러
‘선언문을 봤느냐, 누가 뿌렸느냐’
추궁했다.”

― 당시 졸업생 구술


체포와 침묵, 그리고 서로의 연대

결국,
몇몇 학생이
“수업에 늦었다”는 이유로
학교 밖을 나가려다
몸에 숨긴 선언문이
경찰에 들켜
즉시 연행됩니다.

  • 한 학생은
    고문 끝에
    “혼자 했다”고 진술했지만
  • 동료들은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다”며
    입을 다물었습니다.

학교 안팎의 동문들,
교사들, 선교사들도
학생들을 돕기 위해
경찰서에 찾아가
진술을 바꿔달라
사정하기도 했습니다.

“내 친구를 살려달라고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

― 교사 회고록


그날의 선언문, 그 밤의 외침

경성 시내 곳곳,
배재학당 학생들이 흩뿌린
수백 장의 독립선언문.

  • “조선은 독립국이다.”
  • “우리는 자유인이다.”
  • “정의와 인도, 인류평등의 대의에 따라…”
    손때 묻은 종이 위
    또박또박 눌러 쓴
    조선 청년의 마음이
    바람에 흩날립니다.

이 문서는
길바닥, 담장, 시장,
경찰서 앞, 전차 안
어디서든
누군가의 손에 닿았습니다.


신문과 기록에 남은 배재학당 사건

1919년 3~4월
조선일보, 매일신보, 대한매일신보 등
각종 신문에는
“배재학당 학생들, 독립선언문 배포 혐의로 연행”
“정동 일대 학교 집중 수색”
“외국인 교사, 학생 석방 탄원”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제 당국은
“배후 세력 색출”을 명분 삼아
학교와 교회, 선교관,
학생의 집까지
광범위하게 수색했습니다.

많은 학생이 퇴학, 정학,
심한 경우 강제전학,
투옥당하는 일이 이어졌습니다.


“누구도, 우리 목소릴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배재학당의 사건 이후에도
학생들은
더 은밀하게,
더 집요하게
독립신문, 항일 격문,
자유·자주·연대의
작은 메시지를
교내외에 흩뿌렸습니다.

어떤 학생은
퇴학을 당한 뒤
경성, 평양, 대구,
각지의 학교로 옮겨
또 다른 선언문을 썼고,

일부는
만주, 상해 등지로 건너가
임시정부, 의열단,
독립운동 조직의
젊은 대원이 되었습니다.


교실과 운동장, 그 밤의 용기

“교실 뒤에 앉았던
내 짝꿍의 떨리는 손”
“교복 소매에 숨겼던
작은 선언문 조각”
“새벽마다 담을 넘어
편지를 전하던
외로운 발걸음”

이 모든 기억이
오늘의 배재학당,
그리고 우리에게
작은 영웅담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날, 우리는 모두
자기 목소리로
자유를 선언했다.”

― 1919년 배재학당 구술록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이름 없이,
얼굴 없이
사라진 선언문
그리고 손때 묻은
젊은이의 용기.

그 밤의 소곤거림,
서로의 두려움과 연대,
그리고
교실 창 너머
작은 자유의 외침이
오늘 우리에게
잊지 못할 유산이 되었습니다.

“진짜 독립운동은
우리 같은 평범한 학생들이
처음으로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던
그 밤에서 시작되었다.”


참고자료

  • 배재학당 100주년사
  • 독립기념관 3·1운동 자료집
  • 1919~1920년대 신문, 교사·학생 구술 기록
  • 서울역사편찬원 ‘정동과 독립운동’
  • 현대 항일청년운동 연구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