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1951) — 전쟁의 참극 속에 지워진 이름들

skillplanner80 2025. 8. 16. 07:28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1951) — 전쟁의 참극 속에 지워진 이름들

1. 서론 — ‘빨갱이’라는 낙인 속에서 사라진 생명들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경상남도 산청군·함양군·거창군 일대에서 국군과 경찰이 수백 명의 민간인을 ‘좌익 협조자’로 몰아 집단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정부와 군은 ‘빨치산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토벌 작전을 벌였지만, 그 과정에서 무고한 노인, 여성, 어린이들까지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전쟁 중의 비극을 넘어, 국가권력에 의한 조직적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1951)


2. 사건 발생의 배경

2-1. 6·25 전쟁과 남부 내륙의 빨치산 활동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한 이후, 경남 내륙 산악지대는 빨치산의 활동 근거지 중 하나였다.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는 인민군 잔류 세력과 남로당 계열 무장부대가 은신하며 게릴라전을 벌였다.
이 지역 주민들은 빨치산과 국군 사이에서 양쪽의 요구를 모두 감당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서도 ‘협조자’로 오인받을 위험에 노출됐다.

2-2. 국군과 경찰의 토벌 작전

1951년 2월 이후, 국군 제11사단과 경찰 병력이 합동으로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였다.
토벌 작전의 목표는 무장세력의 제거였지만, 실제로는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검거·심문·처형이 빈번하게 이뤄졌다.
이때 군은 ‘빨치산과 내통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족 단위, 마을 단위로 사람들을 연행했다.


3. 사건 경과

3-1. 산청·함양 사건

1951년 2월 7일, 경남 산청군 금서면과 함양군 서하면 일대에서 군과 경찰은 주민 수백 명을 모아놓고 심문했다.
심문 기준은 매우 자의적이었으며, 신분이 불확실하거나 빨치산과 연관됐다는 소문이 있는 사람은 즉시 처형됐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남성은 물론 10살 미만의 아동과 노약자까지 총살당했고, 시신은 마을 근처 구덩이에 매장됐다.

3-2. 거창 사건

거창군 신원면에서는 1951년 2월 9일경, 국군이 마을 주민들을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집결시켰다.
그 중 상당수를 인근 골짜기로 끌고 가 총살했다.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으며, 심지어 갓난아기도 포함됐다.
당시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총성이 멈춘 뒤에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계속 들렸고, 일부는 부상 상태로 매몰됐다.


4. 피해 규모와 통계

4-1. 공식 조사와 차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세 지역을 합친 희생자는 최소 705명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유족 단체는 실제 희생자가 1,000명 이상일 것으로 본다.
이는 전쟁 중 혼란과 시신 수습의 어려움, 일부 마을의 완전 소멸로 인해 정확한 피해 집계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4-2. 희생자 구성

  • 여성: 전체의 약 60%
  • 어린이(만 15세 미만): 전체의 약 25%
  • 노인(만 60세 이상): 전체의 약 15%

이 통계만 보아도, 이 학살이 군사적 필요가 아닌 비전투 민간인 대상의 대량 학살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사건 은폐와 왜곡

5-1. 군의 공식 입장

사건 직후, 군은 이를 ‘빨치산 협조자 처형’이라고 발표했다.
언론에는 ‘빨치산 토벌의 성과’로 포장되었고, 피해자들이 민간인이라는 사실은 철저히 은폐됐다.

5-2. 피해자 가족의 침묵

유족들은 오랫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반공 이데올로기 체제에서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은 사회적 매장과 생계 파탄을 의미했다.
심지어 일부 유족은 생존을 위해 개명하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아야 했다.


6. 진상 규명 운동

6-1. 민주화 이후의 변화

1987년 6월 항쟁 이후, 유족들은 비로소 공개적으로 진상 규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 유족회가 결성되어 정부와 국회에 여러 차례 진정서를 제출했다.

6-2.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조사

2005년 출범한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을 공식 조사 대상으로 선정했고, 2010년 최종 보고서에서 국가권력이 무고한 민간인을 집단 학살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또한, 국가는 희생자와 유족에게 사과하고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7. 사과와 배상

7-1. 국방부의 사과

2011년 2월, 국방부 장관은 유족들을 만나 공식 사과문을 전달했다.
그러나 배상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으며, 피해자 상당수가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7-2. 보상 문제의 난항

배상 법안은 여러 차례 국회에 제출되었지만, 재정 문제와 ‘형평성’ 논란으로 번번이 무산됐다.
이는 아직도 유족들이 싸우고 있는 현실적인 과제다.


8. 역사적 의의

8-1. 전쟁 범죄로서의 성격

이 사건은 국제인도법상 전쟁 범죄에 해당한다.
전쟁 중 민간인 보호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했으며, 특히 어린이와 여성 대량 학살은 국제사회에서도 극히 중대한 인권 침해로 규정된다.

8-2. 한국전쟁사 속의 민간인 학살

노근리 사건, 거창 사건, 보도연맹 사건 등과 함께, 산청·함양·거창 사건은 전쟁 시기 민간인 피해의 구조적·체계적 양상을 보여준다.


9. 오늘날의 교훈

전쟁 상황에서 ‘국가 안보’와 ‘적 색출’이라는 명분 아래, 얼마나 쉽게 인권이 유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반면교사로 삼아, 비상 상황에서도 인권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는 민주적 통제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10. 결론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계속 질문을 던지는 역사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는 존재인가’, ‘전쟁 속에서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인간 존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