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신간회 해소 사건 (1931) — 해체된 희망, 무너진 연대의 기록

skillplanner80 2025. 7. 30. 00:22

🏛️ 신간회 해소 사건 (1931) — 해체된 희망, 무너진 연대의 기록


1. 서론 – 희망이었던 신간회, 왜 스스로 해산했는가?

1927년 창립된 신간회(新幹會)는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서 유일하게 전국 단위로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대표적인 항일 민족운동 단체였다.
그러나 그 신간회가 불과 4년 만인 1931년, 자체 총회를 통해 해산을 결의한다.
이는 단순한 조직 정리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당대 조선 민족운동의 좌우 갈등, 일제의 탄압, 내부의 한계가 복합적으로 얽힌 사건이다.

신간회의 해소는 단순히 하나의 조직 해산을 넘어서,
1930년대 조선 항일운동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대한 전환점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신간회의 성립부터 해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며,
이 사건이 한국 근현대사에 갖는 함의를 짚어보고자 한다.

 

신간회 해소 사건의 단면


2. 신간회의 창립 배경 – 좌우 연합이라는 실험

1920년대 조선의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각자 독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지만, 방법론과 노선이 달라 서로 충돌하거나 고립되기 일쑤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에 맞춰 일어난 6.10만세운동은
좌우 양 진영이 합동으로 참여한 최초의 전국적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후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는 민족유일당 운동이라는 구호 아래 연합 논의를 본격화하였고,
그 결실로 1927년 2월 15일, 경성에서 신간회 창립 총회가 열렸다.


3. 신간회의 활동과 조직

신간회는 “정치적·경제적 각성과 단결을 통한 조선 민중의 권익 향상”을 기본 목표로 내세웠다.
그 활동은 크게 다음과 같다.

  • 농민운동 지원: 소작쟁의, 소작료 인하 운동 지원
  • 노동운동 지원: 파업 투쟁에 법률·재정·조직적 도움
  • 학생운동 연대: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 현장조사단 파견
  • 계몽활동: 강연회, 간행물, 출판물 등으로 민중 계몽
  • 식민통치 비판: 치안유지법, 언론탄압법 등에 대한 비판 전개

전국 각지에 140여 개의 지회와 수천 명의 회원을 보유한 대규모 조직이었으며,
당시 언론, 종교, 교육계 인사까지 폭넓게 참여했다.

신간회는 법적 허용 하에 활동한 유일한 항일조직이었기에,
조선 민중 사이에서 큰 신뢰를 얻었고 전국 단위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4. 일제의 압박과 내부 갈등의 시작

하지만 신간회의 성장과 영향력 확장은 곧 일제의 경계 대상이 되었다.
총독부는

  • 신간회 간부들의 활동을 밀착 감시했고,
  • 지회 간부들을 자주 소환하거나
  • 간행물을 검열 또는 압수하였다.

더 큰 문제는 내부 노선 갈등이었다.

민족주의 진영:

  • 신간회를 '계몽 중심의 합법 운동 단체'로 보았으며, 점진적 독립을 추구

사회주의 진영:

  • 보다 급진적이고 계급적 노선을 지향하며, 신간회를 혁명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성향

특히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둘러싼 대응방식에서
민족주의파는 “지원은 하되 지나친 개입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반면,
사회주의파는 “이것이 민중혁명의 신호탄”이라 보며 강력한 지지운동을 주장했다.

이러한 차이는 조직 내 갈등으로 발전했고,
몇몇 지회에서는 동시에 ‘민족주의파 vs 사회주의파’ 분열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5. 해소의 전개 — 왜 스스로 문을 닫았는가?

1930년 들어 일제의 통제가 더 강화되고,
사회주의계 인사 상당수가 치안유지법으로 체포되면서 조직력 약화가 가속화되었다.

결정적 계기는 1931년 5월 평양에서 열린 신간회 총회에서 일어났다.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이 나왔다:

  • "이제 신간회의 법적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 "좌우 통일은 이상일 뿐, 현실적으로 지속이 어렵다"
  • "불필요한 내부 충돌을 막기 위해 스스로 해소하자"

결국 총회에서는 찬반 논의 끝에 ‘자진 해소’ 결정을 만장일치로 의결했고,
이로써 신간회는 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전국적 항일연합단체로서의 활동을 종료하게 된다.


6. 이후의 영향과 평가는?

신간회의 해소는 조선 민족운동사에 있어 커다란 후퇴이자, 분열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신간회가 남긴 유산은 다음과 같다.

  • 전국 단위 민족 조직이 실제로 운영될 수 있다는 전례 제공
  • 좌우 이념 차이를 ‘현장 활동’으로 일시 극복한 모범
  •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지하조직 재건 계기
  • 해소 이후, 많은 활동가들이 독자적 저항조직 또는 해외망명 투쟁으로 이어짐

학계에서는 “민족 유일당 운동의 실험은 실패했지만, 그 시도 자체는 유의미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신간회의 활동과 해체는 1930년대 무장투쟁 강화, 1940년대 임시정부 계열 통합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7. 마무리 — 해체된 조직, 사라지지 않은 정신

1931년의 해소는 겉으로 보자면 하나의 조직이 사라진 것이지만,
그 정신은 이후로도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 조선 민족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신간회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 규모나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극심한 억압 속에서도 좌우가 함께 꿈꿨던 통합의 가능성,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했던 이념을 뛰어넘은 용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의 시대에도 여전히 그 정신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갈등과 대립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공통의 목표를 위해 손을 맞잡는 일이 왜 중요한지
신간회는 역사로서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