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이육사 체포 사건 (1937) — 시인이자 투사, 조선의 미래를 품은 폭탄

skillplanner80 2025. 8. 2. 01:20

이육사 체포 사건 (1937) — 시인이자 투사, 조선의 미래를 품은 폭탄

 

이육사 시인 체포 현장


1. 서론 — 시인이며 저항가였던 사나이

‘청포도’라는 시로 잘 알려진 이육사(李陸史).
우리는 그를 흔히 문학 교과서 속 저항 시인으로 기억하지만,
그는 단지 글로 항일을 외친 지식인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무기를 들고 독립을 준비했던 실천적 투사였다.

1937년, 그는 조선 본토에 다이너마이트를 들여오려다
체포되고 고문당하며 또다시 투옥된다.
이 사건은 조용히 기록 속에 묻혔지만,
그의 진짜 삶을 마주하게 하는 결정적 장면이기도 하다.

이번 글에서는 이육사의 체포 사건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 의지, 문학과 저항을 함께 살펴본다.


2. 이름, 육사 — 감옥번호에서 시작된 정체성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다.
그는 안동의 유학자 집안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경성고등보통학교와 중국 베이징 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교육제도와 식민사관에 환멸을 느끼고
20대 초반부터 무장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한때 조선독립군과 연계된 의열단 활동에 가담했으며
폭탄 제조와 운반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이육사’라는 이름을 쓰게 된 건
1930년 대구형무소에서 수감되었을 때 받은 수인번호 ‘264’번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육사’는 억압과 투쟁의 흔적이자,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3. 1937년 — 일제의 전시체제와 강경탄압기

1937년은 중일전쟁이 발발한 해였다.
일제는 조선을 군수기지로 만들고자,
언론, 교육, 문화, 출판 등 모든 분야에서 전면적인 통제와 동화 정책을 실행했다.

이육사는 이런 시기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접촉하였고,
조선 내에서의 파괴 공작을 준비한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조선으로 반입하고자 했고,
이를 경성, 대구 등 주요 지역에 은밀히 배치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의 목표는 단순한 테러가 아니라,
“민중의 정신을 일깨우는 충격과 각성”이었다.


4. 체포 — 독립을 품고 조선에 돌아온 순간

1937년 가을, 이육사는 다이너마이트 일부와 함께
조선으로 몰래 잠입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밀정의 밀고로 인해 평양역 근처에서 체포된다.

그의 가방에서는

  • 폭약 일부
  • 회합 장소 메모
  • 중국어로 된 문서
  • 의열단 관련 문서 복사본
    이 발견되었다고 알려진다.

이 사건은 일제 입장에서 무장 독립운동 재개 가능성을 경고하는 신호였고,
이육사는 ‘불령선인 고등사범’이라는 최고 등급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혹독한 고문과 심문을 받게 된다.


5. 고문과 투옥 — 육사는 부서졌는가?

그는 평양 헌병대와 경성 경무국에서
무려 6개월 간에 걸친 조사와 수감을 받았다.
그는 고문으로 인해 청각과 시력 일부가 손상되었고,
구강 출혈과 관절 손상이 심각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배후, 조직, 목적 등을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폭약 운반 목적에 대해서도 “창작 재료로 쓰기 위해서였다”고 말하며
조롱에 가까운 진술을 남겼다.

결국 그는 징역 2년형을 받고 경성형무소에 수감된다.
이후에도 10차례 가까운 투옥과 감시를 견디며,
시와 투쟁을 함께 껴안은 삶을 이어간다.


6. 문학과 투쟁 — 글로 싸운 마지막 시간들

그는 감옥에서조차 펜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서 쓴 시들이
훗날 우리가 기억하는
‘이육사’의 정체성을 만든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 「청포도」 (1941)

“절망도 거기서 다시 시작된다”
— 「광야」 (1946)

그의 시는 단지 상징이 아니라
고문과 억압을 견디며 뱉은 육체의 문장이었다.


7. 최후 — 베이징에서 맞은 죽음

1944년, 그는 다시 상하이를 거쳐
중국 베이징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또다시 체포된다.

이번엔
중국 내 일본 헌병대에게 끌려가
심문 중 사망했다는 설이 유력하며,
시신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공식적으로는 ‘병사’로 처리되었지만,
사실상 고문에 의한 타살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의 죽음은 시인이자 투사로서의 삶을
처참하지만 고결하게 마무리한 순간이었다.


8. 맺음말 — 단지 시인이 아니었다

우리는 종종 이육사를
시인, 저항 문인, 청포도의 주인공으로만 기억하지만
그는 진짜로 총을 준비하고 폭탄을 든 혁명가였다.

그의 시는
낭만이 아니라
살과 피로 쓰인 기록이었고,
그의 이름은
예술이 아니라
저항의 문장이었다.

우리는 그를,
시인 이전에
조국을 향해 걸었던 사람으로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