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일제의 민족정신 제거 정책과 종교 통제: 1935년 ‘천도교 계열 인물 검거 사건’을 중심으로

skillplanner80 2025. 8. 4. 07:19

일제의 민족정신 제거 정책과 종교 통제: 1935년 ‘천도교 계열 인물 검거 사건’을 중심으로


서론: 종교인가, 민족운동인가 — 천도교의 복합적 정체성

1935년, 일제는 조선 종교계의 핵심 축이던 천도교 내부 인사들을 대거 검거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이 사건은 단순한 종교 지도자 체포가 아니었다.
이는 일제가 조선 민족정신의 심장부를 제거하려는 전략적 조치이자, 사상적 저항 기반에 대한 ‘정밀 타격’이었다.

천도교는 3·1운동의 주도 세력으로서, 그 이념과 조직력 모두에서 일제의 ‘총독정치’에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1930년대 들어 이러한 저항적 성격은 더 조직화되고 확산되면서, 일제는 종교적 관용의 탈을 벗고 본격적인 억압 국면에 진입하게 된다.

천도교 인물 검거 사건


1. 동학의 계승자, 천도교: 사상과 조직의 이중구조

천도교는 19세기 말 동학농민운동의 주체였던 *동학(東學)*을 근대적으로 계승한 민족종교다. 손병희가 1905년 천도교로 개칭한 이후, 이 종교는 단순한 신앙체계에 머물지 않고, 민족 계몽, 사회 개혁, 교육 운동을 선도하는 복합적 조직체로 발전한다.

천도교는 자체 학교 설립, 출판 사업(《개벽》《신인간》 등), 청년 및 소년 단체 조직, 야학 운영 등을 통해 조선 민중의 ‘의식화’를 유도했고, 이는 일제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민족동원의 기반이 되었다.


2. 3·1운동 이후, 감시의 대상이 된 천도교

1919년 3·1운동은 일제에게 천도교의 조직력과 정치력을 뼈저리게 각인시킨 계기였다. 독립선언서 초안을 주도적으로 작성한 것이 천도교 지도자들이었고, 전국 조직망을 통해 대중적 만세운동이 일파만파 확산되었다.

이후 일본은 천도교에 대한 조직적 감시 체계를 가동하기 시작한다. 총독부 경무국은 천도교 본부 및 산하 조직의 행보를 지속적으로 추적했고, 경찰은 천도교 청년회원들의 강연 내용과 야학 활동에 대해 사상 검열을 강화했다.


3. 1935년, 검거 사건 발생 배경

1930년대 중반은 **중일전쟁 발발 이전의 이른바 ‘전시체제 전환기’**로,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서 단순 통치하는 것을 넘어, 총력전 수행의 인적·정신적 자원으로 흡수하는 체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천도교의 계몽운동, 민중 동원력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특히 천도교는 좌우 이념을 초월하는 ‘비정치적 민족주의 종교’로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운동처럼 노골적인 탄압이 어렵다는 딜레마가 있었다.

따라서 일제는 1935년 7월경, 경찰 권력을 동원해 천도교 지도자 및 청년 활동가 20여 명을 체포하며, '치안유지법 위반' 및 '국체 변혁 선동' 혐의를 적용하였다.


4. 검거 대상 인물 및 활동 내용

검거 대상자들은 대부분 천도교의 중앙교당 실무진, 지방 교구 간부, 청년회 간부, 야학 교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청년회 조직 운영: 청년의 민족의식 함양과 사회참여 유도
  • 야학 개설: 문맹 퇴치 및 근대 교육 제공
  • 강연 및 집회 개최: 사회 문제 인식, 근대 시민의식 확산
  • 출판 활동: 종교 간행물 위장하에 계몽적 내용 포함

이러한 활동은 모두 일제의 시각에서 **‘민중을 선동할 수 있는 불온 활동’**으로 간주되었고, 이들은 종교를 앞세워 민족주의를 고양한다는 명목 아래 검거되었다.


5. 종교와 정치의 경계에서: 일제의 전략

일제는 종교를 민중 통제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신사참배 강요, 기독교·불교·유교의 정통파 회유, 조선총독부 주관 종교 연맹 구성 등은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천도교만은 독립적인 조직력과 대중적 신뢰도로 인해 통제 불능의 대상이었다.

특히 천도교는:

  • 좌우 진영 모두와 연대할 수 있는 구조
  • 종교 외피로 정치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융통성
  • 전국적 조직망을 활용한 민중 동원 가능성

이러한 특성 때문에, 천도교는 반드시 ‘해체 혹은 무력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규정되었다. 1935년의 검거는 이 과정을 위한 예비 조치였다.


6. 검거 이후의 여파와 천도교의 쇠퇴

검거 사건 이후, 천도교는 급속히 내부 결속력을 상실한다.
청년 조직이 와해되었고, 중앙교단은 활동 자제를 선언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천도교는 정치적 기능과 민족운동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중단하게 된다.

결국 일제의 전략은 성공했다.
천도교는 이후 종교적 의례에 집중하는 ‘내향적 종교’로 변화했고, 광복 이후에도 민족 종교로서의 영향력을 되찾지 못한다.


결론: 이념과 종교, 식민지 권력의 경계에서 사라진 목소리들

1935년 천도교 인물 검거 사건은 단순한 종교 탄압 사건이 아니다.
이는 일제 식민 권력이 조선 민족의 정신적 자주성까지 통제하려 했던 ‘정신 식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검거된 인물들의 이름은 대부분 역사에서 지워졌지만, 그들이 보여준 비정치적 방식의 정치적 저항은 오늘날 한국 시민사회가 가져야 할 성찰의 지점을 제시한다.

종교와 정치, 계몽과 통제, 조직과 감시 사이의 긴장 속에서,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무엇이 민족의 정신을 지켜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