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일제 강점기, 철창 안에서 울려 퍼진 외침― 경남 진주형무소 수감자 집단 단식 사건 (1928)

skillplanner80 2025. 8. 9. 01:13

일제 강점기, 철창 안에서 울려 퍼진 외침

― 경남 진주형무소 수감자 집단 단식 사건 (1928)


1. 조용한 도시 진주, 들끓는 민족의식

1928년 4월, 경상남도 진주는 일제 통치 18년째를 맞은 비교적 조용한 도시였다.
그러나 그 조용함은 철창 속에서 억눌린 분노와 신념을 덮고 있었을 뿐,
언제든 터질 듯한 민족 저항의 불씨가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당시 진주형무소에는 다양한 이유로 투옥된 수감자들이 있었다.
강도나 절도범 같은 일반 범죄자도 있었지만,
그중 많은 이들은 일제에 항거한 '사상범' 또는 '정치범'으로 분류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그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글을 쓰고, 말을 전하고, 행동한 죄로 갇혀 있었다.

진주 형무소 집단 단식 사건


2. 형무소 안에서의 현실 – 비인간적 처우와 차별

진주형무소는 조선 내에서도 '가혹한 수감 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정치범들에게는 하루 800칼로리도 되지 않는 식량이 주어졌고,
벌거벗겨진 채로 얼음장 같은 바닥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이 흔했다.

무엇보다도, 일반 범죄자보다 정치범들에게 더 가혹한 처우가 적용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제국에 반역한 자”라며 사상범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면회 제한은 기본이었고, 종교 활동은 물론, 책을 읽을 권리조차 철저히 통제됐다.

하지만 수감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자유는 없지만, 정신은 구속할 수 없다는 신념이 그들을 버티게 했다.


3. 집단 단식의 시작 – “우리의 인권을 보장하라”

1928년 4월 12일,
진주형무소 내 정치범들 사이에 조용한 결의가 퍼져나갔다.
그들은 사흘 뒤인 4월 15일부터 집단 단식에 돌입할 것을 서로 약속했다.

단식 참가자는 총 29명.
이들은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등 각지에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이었고,
독립신문 발행인 출신, 노동운동가, 학생운동가, 기독교 청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외친 요구는 단순했다.
“사람답게 살게 해달라.”

  • 정치범도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켜달라.
  • 일제의 과도한 처우는 국제법 위반이다.
  • 최소한의 건강과 위생을 보장해달라.

4. 일제의 반응 – 고문과 강제 급식

형무소 측은 집단 단식이 시작되자 처음에는 무시 전략으로 일관했다.
“며칠 굶으면 스스로 밥을 달라 할 것이다.”
그러나 5일이 지나도 버티는 수감자들 앞에서, 그들의 계산은 무너졌다.

당국은 결국 물리적 탄압에 나섰다.
쇠몽둥이와 곤봉으로 단식 참여자들을 구타하고,
억지로 죽을 떠먹이며 ‘강제 급식’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고막이 찢어지고, 갈비뼈가 부러진 수감자도 발생했다.

특히 대표적 사상범인 박진형(가명)은 강제 급식 도중 기도를 막혀
사망 직전까지 갔으며, 이를 본 동료 수감자들은 더욱 분노했다.
결국 단식 참가자들은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5. 전국으로 번진 연대 – 옥중에서 퍼지는 외침

진주형무소의 상황은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언론인과 종교계를 통해 외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천도교, 기독교, 일부 천주교 단체는
“진주형무소 인권 침해 중단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회주의 계열 청년동맹, 조선학생연맹 등도
“형무소 내 단식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라”며 성토문을 배포했다.
형무소 내부의 외침이 이제 조선 전체의 분노로 번지고 있었다.


6. 단식의 끝, 그러나 저항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4월 25일, 단식 11일째.
진주형무소 측은 결국 일부 수용자에게
식량 개선과 규정 완화를 약속하며 단식을 종료시켰다.

그러나 이는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이후에도 진주형무소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고,
단식에 참여했던 수감자 일부는 이후 정기적인 고문에 시달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수감자의 인권’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조선 내 담론으로 등장한 첫 번째 사례로 평가받는다.


7. 역사가 묻어버린 이야기, 그러나 오늘도 유효한 질문

진주형무소 집단 단식 사건은
독립운동사에서도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대중적인 영웅도 없고, 당장 무언가를 이룬 사건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묻는다.

  • 억압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가?
  • 감옥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정신까지 구속할 수 있는가?
  • 인권과 독립은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단지 과거의 것이 아니다.
억압에 저항하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고자 했던
그날의 외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리고 있다.


📌 마무리하며

‘진주형무소 집단 단식 사건’은
우리 역사에서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 독립운동이 단지 총과 칼의 전투만이 아니라
인권, 존엄, 정신적 저항의 총합이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진주라는 지역적 배경을 넘어,
형무소라는 ‘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싸운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