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나주농업학교 학생 항일동맹휴학 사건 (1929)— 광주학생운동의 불씨를 이어받은 청년들의 외침
전남 나주농업학교 학생 항일동맹휴학 사건 (1929)
— 광주학생운동의 불씨를 이어받은 청년들의 외침
1. 서론 – 광주에서 나주로 번진 항일의 불씨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는 식민지 조선 청년사의 흐름을 바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폭발했다.
이 운동은 단순한 학생 간 충돌 사건에서 시작됐지만, 곧 일본 제국주의의 차별 정책과 민족 억압에 대한 전국적 저항으로 확산됐다.
광주의 불씨는 인근 도시와 학교로 빠르게 퍼져 나갔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곳이 바로 전남 나주농업학교였다.
나주농업학교 학생들은 단순히 동조 시위를 벌인 것이 아니라, 학교 전체가 참여한 대규모 동맹휴학을 감행했다.
이 사건은 광주학생운동의 직접적인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중요한 지역 항일운동이자, 농촌 청년들이 민족운동의 한 축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2. 사건의 배경 – 1920년대 후반 조선의 사회·정치 상황
1920년대 후반 조선은 정치적으로는 치안유지법과 같은 악법 아래 숨 막히는 억압을 받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조선 농촌에도 전해져, 농민들은 소작료와 고리채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티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청년 학생들은 단순히 학업만을 이어가기보다는, 민족의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을 품게 됐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토양에서 싹튼 것이며, 나주농업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도 이와 맞물려 발생했다.
3. 나주농업학교 – 농촌 청년운동의 산실
나주농업학교는 1920년대 전남 지역에서 손꼽히는 근대식 농업 교육기관이었다.
- 목표: 근대 농업기술 습득, 농촌 경제 발전, 농민 계몽
- 구성원: 주로 농민 자제들이었지만, 일부는 도시 출신 중등교육 희망자
- 특징: 농업교육 외에도 시사토론, 문학회, 체육활동 등 비교적 자유로운 동아리 문화 존재
그러나 학교의 일상은 점차 변질됐다. 1920년대 후반 들어 일본인 교사와 관리자가 늘어나고, 조선인 교사의 발언권이 줄어들었으며, 일본어 사용 강요와 일본식 예절이 교육 전반에 스며들었다.
4. 광주학생운동의 불씨가 옮겨붙다
1929년 11월 초, 광주에서 벌어진 학생 시위 소식이 나주에 전해졌다.
- 소식을 전한 사람: 광주에서 시위에 참여했던 졸업생, 그리고 광주와 나주를 오가던 상인들
- 학생들의 반응: 분노와 공감, 그리고 ‘우리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결의
당시 나주농업학교는 기숙사 제도를 운영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은밀한 토론회가 가능했다.
학생회 간부들은 며칠간의 회의 끝에 전교생이 참여하는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5. 동맹휴학의 전개
1929년 11월 15일, 나주농업학교 학생 전원 약 200여 명이 수업을 거부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 일본인 교사의 민족차별 철폐
- 조선어 수업 확대와 국사 교육 부활
- 일본 학생들의 조선인 학생 폭행 사건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 식민지 교육 정책 철회
학생들은 강당에 모여 구호를 외쳤고, 일부는 태극기를 꺼내 흔들었다.
학교 측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나주경찰서 일본인 형사들이 학교로 들이닥쳤다.
6. 일제 경찰의 탄압
경찰은 학생 대표 10여 명을 현장에서 체포했고, 기숙사와 교실을 수색했다.
압수품에는
- ‘조선 독립 만세’라고 적힌 손팻말
- 광주학생운동 소식을 전하는 전단지
- 민족시와 독립운동 관련 서적
이 포함돼 있었다.
체포된 학생들은 나주경찰서 유치장에서 고문과 협박을 당했다.
- 매질과 물고문
- 퇴학 협박
- 가족에게 연락해 ‘불온한 아들을 두었다’며 압박
이로 인해 상당수 학생이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일부는 결국 퇴학 처리됐다.
7. 사건의 확산과 여파
이 사건은 나주뿐 아니라 전남 일대 농업학교, 상업학교, 보통학교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나주에서의 소식을 들은 목포·순천 등지의 학생들도 소규모 동맹휴학이나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는 철저히 사건을 차단하려 했다.
- 지역 언론 보도 금지
- 체포자 명단 비공개
- 광주학생운동과의 연계성 은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주농업학교 사건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고리로 작용했다.
8. 사건의 역사적 의의
- 농촌 청년의 항일운동 참여
도시 학생뿐 아니라 농업학교 학생들도 민족운동의 중요한 주체였음을 보여줬다. - 광주학생운동의 확장
단일 도시의 시위가 전국적인 학생 항일운동으로 번진 계기를 마련했다. - 민족교육에 대한 요구
단순한 반일 감정 표출을 넘어, 구체적으로 조선어·국사 교육을 요구했다. - 지역사회 영향
학생들의 행동이 농민과 상인 등 일반 시민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했다.
9. 오늘날의 시사점
나주농업학교 학생들의 항일동맹휴학은 ‘작은 도시의 작은 학교’에서도 민족해방의 불씨가 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보여준 용기와 연대 정신을 기억해야 하며, 특히 교육의 자유와 정체성 수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겨야 한다.
10. 결론
1929년 전남 나주농업학교 학생 항일동맹휴학 사건은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일부이자, 동시에 독립적인 지역 항일운동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청년들이 단순히 시대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시대를 이끌어 나갔다는 증거다.
그들의 용기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기에, 빛나는 등불과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