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천주교 농민야학 검거 사건 (1936) – 조선 민중의 문해운동을 범죄로 만든 일제
전라남도 천주교 농민야학 검거 사건 (1936) – 조선 민중의 문해운동을 범죄로 만든 일제
📌 서론 – 야학, 배움의 불씨가 된 조선의 밤
1936년 전라남도 어느 시골 마을. 해가 지면 농민들은 들에서 일손을 놓고 마을 성당이나 교실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단순했다. 글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찾은 곳은 ‘야학’—밤에 이루어지는 교육기관이었다. 이 야학은 천주교 신자와 교리 교사들, 청년 농민들이 함께 만든 자발적인 문해 교육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 순수한 배움의 공간은 일제의 눈에는 달랐다.
1936년, 조선총독부는 이 야학을 '불온사상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관련자 수십 명을 연행·구금하는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다루는 **‘전라남도 천주교 농민야학 검거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문해운동의 탄압을 넘어, 민중의 각성에 대한 일제의 공포와 식민지적 억압의 실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다.
🕯 사건의 배경 – 문맹의 그늘 아래 놓인 농촌 조선
1920~30년대 조선의 농촌 사회는 극심한 가난과 문맹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전라남도는 일제의 쌀 수탈 정책과 토지 조사사업의 여파로 농민들의 삶이 피폐해졌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35년 기준 조선 전역의 문맹률은 70% 이상이었으며,
농촌 지역은 85%를 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천주교는 농민에게 ‘읽고 쓰는 힘’이 곧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야학을 열기 시작했다.
주로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성경과 한글, 기초 산술, 생활 위생 등을 가르쳤다.
종교교육과 인권교육, 민중의 삶에 대한 이해를 결합한 독특한 교육 방식은 농민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 천주교 야학의 확산 – 성스러운 교회, 배움의 교실이 되다
야학은 단순한 문해 교육 기관이 아니었다.
그곳은 조선 민중이 처음으로 ‘자신의 권리’를 언어로 배운 곳이었고,
글자를 통해 세상과 자신을 새롭게 보는 장소였다.
성당이나 공소(작은 교회)를 중심으로 밤마다 열리던 수업은
교리교사, 수녀, 신학생, 청년 신자들이 자원봉사로 참여했고,
학생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교재는 주로 다음과 같은 구성으로 이뤄졌다:
- 성경 말씀 중 한 구절을 읽고 한글로 받아쓰기
- 일제 식민 통계 속 조선인의 삶과 수치 분석
- 농민운동사나 독립운동사 일부 발췌 낭독
- 시사 토론: 세금, 토지 문제, 노동시간 등에 대한 자유토론
문제는 바로 이 지점이었다.
야학은 조선 민중에게 ‘말하는 법’을 가르쳤고, ‘생각하는 법’을 심어줬다.
그리고 이는 일제의 통치 기조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행위였다.
🚨 검거의 전개 – 야학을 좌익으로 몰아간 식민 권력
1936년 봄, 전라남도 경찰부는 '야학 내에서 사회주의 선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며
해남, 강진, 영암, 순천 등지의 천주교 농민야학을 일제히 단속했다.
당시 총독부 경찰은 3가지 혐의를 적용했다.
- 치안유지법 위반 – 사회주의적 내용 강의
- 불온문서 유포 혐의 – 민중계몽 서적의 소지
- 종교시설 내 불법집회 – 허가 없이 야간에 인원 모임
이 작전으로 인해 총 38명의 야학 관계자가 구금되었으며,
그 중 신학생 2명과 청년교사 5명은 기소 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감자들 중 일부는 고문을 받아 청력이나 언어 기능에 장애를 입기도 했으며,
야학은 모두 폐쇄되었고, 성당은 ‘정치사상 조장 공간’으로 낙인찍혔다.
📚 식민지 권력의 교육 통제와 야학의 충돌
일제는 조선인의 교육을 ‘순치(馴致)’의 도구로 삼았다.
그들은 조선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일본에 순종하는 기술교육’일 뿐이라 여겼고,
자발적인 지식 전달과 민중 의식 고취는 금기 사항이었다.
야학은 이러한 틀을 거부했다.
스스로 기획하고 운영하며, 글자를 통해 현실을 인식하고 변화를 모색했다.
이는 조선인들이 ‘식민지 신민’이 아니라 ‘생각하는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따라서 천주교 농민야학 검거 사건은 단순한 종교기관 탄압이 아니라,
‘지식과 말’을 무기로 삼은 민중의 자생 운동을 향한 전면 탄압이었다고 볼 수 있다.
🕊 사건의 의의와 현재적 재조명
이 사건은 이후 한국 천주교 내부에서도 한동안 공론화되지 않았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 반공 분위기 속 ‘좌익 혐의’라는 낙인 회피
- 당시 문서와 기록의 부족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역사 연구자들과 천주교 인권단체들은 해당 사건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남인권운동사연구회 등의 공동 작업을 통해
야학 교사들의 증언이 채록되었고, 당시 사용된 교재 일부가 복원되었다.
현재 광주·전남 지역 천주교계에서는
이 사건을 **‘교육을 통한 인권운동의 시초’**로 평가하며
야학 복원 사업과 역사교육 콘텐츠 개발에 힘쓰고 있다.
✍️ 결론 – 불을 지핀 것은 연필이었다
1936년 전라도의 밤, 농민들은 글을 배우기 위해 촛불을 밝혔다.
그 불빛은 교회의 창을 넘어, 식민 권력의 어두운 장막까지 비추고 있었다.
일제는 그 불을 끄려 했지만,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있는 권리”, “읽고 쓰는 자유”**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 작은 촛불은, 훗날 전국적인 교육운동과 시민의 권리 의식을 키우는 큰 불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