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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아산 청년독서회 검거 사건 (1932) — 책으로 항일의 불씨를 지핀 청년들

skillplanner80 2025. 8. 15. 02:48

충남 아산 청년독서회 검거 사건 (1932) — 책으로 항일의 불씨를 지핀 청년들

1. 서론 — 책으로 세상을 바꾸려던 청년들

1932년 충청남도 아산.
일제의 강점이 한창이던 시기, 식민지 조선의 시골 마을에서도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자유를 갈망하는 작은 불씨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책과 토론을 사랑한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름하여 ‘청년독서회’.
당시 조선 곳곳에는 지식과 계몽을 통해 민족의 독립과 사회의 개혁을 꿈꾸던 다양한 독서회와 야학이 존재했습니다.
아산 청년독서회도 그중 하나로, 겉으로는 ‘교양 증진과 독서 습관 함양’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독립운동 사상과 사회주의, 민족해방 이념이 담긴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눈에는 이런 모임은 ‘불온단체’였습니다.
책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라, 사람의 의식을 바꾸고 행동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강력한 무기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1932년, 아산 청년독서회 회원들은 일제 경찰의 급습으로 모두 체포되고 모임은 강제로 해산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충남 아산 청년독서회 검거 사건입니다.

 

충남 아산 청년독서회 검거 사건 (1932)


2. 시대적 배경 — 독서회와 청년운동의 확산

1920~30년대는 조선 사회 전역에 청년회, 독서회, 농민회, 노동야학과 같은 민중 계몽단체가 빠르게 퍼진 시기였습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요인에 기인합니다.

  1. 3·1운동의 영향
    1919년의 거대한 민족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인의 민족의식과 주체성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직접 무력 항쟁을 벌이는 대신, 지식과 조직을 바탕으로 한 지속 가능한 항일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
  2. 문화통치와 감시체제
    1920년대 초반,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언론·출판·집회에 일부 자유를 허용했지만, 이는 겉치레에 불과했습니다.
    실제로는 모든 사상운동을 철저히 감시했고, 사회주의·민족주의 사상이 담긴 책과 모임은 언제든 탄압의 대상이 됐습니다.
  3. 농촌 계몽운동의 확산
    동아일보의 ‘브나로드 운동’이나 각종 야학·독서회 활동은 농촌 청년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농민·노동자·학생들은 ‘배우는 것’이 곧 ‘나라를 되찾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충남 아산에도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아산 청년독서회’의 시작이었습니다.


3. 아산 청년독서회의 성격과 활동

아산 청년독서회는 약 15~20명의 젊은이들로 구성되었습니다.
회원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농촌 청년이었으며, 일부는 인근 학교를 졸업한 학생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매주 1~2회 정기 모임 개최
  • 독립운동 관련 서적, 사회과학서, 시·소설 등을 읽고 토론
  • 문맹 퇴치를 위한 야간 글쓰기·읽기 교육
  • 시사토론을 통한 시대 인식 제고
  • 지역 농민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문화강연

읽었던 책들

경성, 평양, 일본에서 몰래 반입된 책들이 회지 형태로 돌았는데,

  • 《조선혁명선언》 (신채호)
  • 《자본론》 요약본
  • 독립신문 사설 모음집
  • 사회주의 계열 잡지 《붉은 깃발》 발췌본
    등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런 자료들은 합법적으로 구할 수 없는 금서였기에, 은밀하게 보관하고 돌려 읽어야 했습니다.

4. 사건의 발단 — 경찰의 첩보 입수

1932년 초, 아산 경찰서는 한 일본인 교사의 밀고로 ‘청년독서회’의 실체를 파악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교양 모임처럼 보였지만, 내부에서는 ‘불온서적’을 읽고 ‘혁명’과 ‘독립’을 이야기한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일제 경찰은 이를 ‘사상범 집단’으로 규정하고,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협의 끝에 기습 검거 작전을 세웁니다.


5. 검거 작전 — 한밤의 급습

1932년 5월 어느 밤, 회원들이 모여 토론을 하던 마을 회관 건물에 10여 명의 헌병과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책상 위에는 방금 읽던 《조선혁명선언》과 시사잡지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손으로 쓴 격문이 붙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현장에서 회원 14명 전원을 연행했고, 압수품으로는 책자 50여 권, 회의록, 회원 명부가 있었습니다.
체포된 청년들은 아산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뒤, 며칠간 혹독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6. 재판과 형량

검거된 회원 중 5명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각각 징역 6개월~2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나머지 회원들도 대부분 보호관찰이나 석방 후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치안유지법은 ‘국체 변혁’을 꾀하거나 사유재산제 폐지를 주장하는 사상을 처벌하기 위한 법률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민족계몽 활동을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되었습니다.


7. 사건의 파장

아산 청년독서회 검거 사건은 단순히 한 시골 마을 청년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1. 지역 사회의 충격
    평범한 농촌 청년들이 ‘사상범’으로 몰려 감옥에 간 사건은 마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독립’과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독서회 활동 위축
    사건 이후 충남 지역의 다른 독서회와 야학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동이 되었고, 많은 단체가 해산하거나 비밀활동으로 전환했습니다.
  3.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식 모색
    공개적인 독서회가 불가능해지자, 일부 청년들은 비밀결사종교단체를 통한 간접 계몽활동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8. 역사적 의의

아산 청년독서회 사건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 지식과 사상이 무기였던 시대
    총칼 없이도 책과 토론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시도였다는 점에서, 지식인의 역할과 청년운동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 일제의 공포 정치
    단순한 독서 모임조차 탄압한 일제의 민낯을 드러낸 사건입니다.
  • 농촌 청년의 정치화
    도시 학생운동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지만, 농촌에서도 청년들이 사회문제에 눈을 뜨고 행동했다는 증거입니다.

9. 결론 — 잊혀진 이름들을 기억하며

충남 아산 청년독서회 검거 사건은 오늘날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이름 없는 이들의 작은 행동과 희생으로 만들어집니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그 청년들의 열정과 용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오늘 이 글이, 그 잊혀진 항일의 불씨를 다시 밝히는 작은 불꽃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