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형평사 운동 (1923~1930s) —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조선의 첫 인권운동”

skillplanner80 2025. 7. 31. 01:47

⚖️ 형평사 운동 (1923~1930s) —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조선의 첫 인권운동”


1. 서론 — “나는 사람이다”라는 가장 기본적인 선언

조선 사회에서 백정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직업을 넘어 사회적 낙인 그 자체였다.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백정은 도축, 가죽, 사냥 등 생계의 가장 밑바닥을 담당하며
‘천민’으로 분류되어왔다. 조선 말기에는 신분제가 폐지되었지만, 차별의 인식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1923년, 조선의 한 지역에서 백정 출신 청년들이 스스로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같은 조선 사람이다. 왜 이름도, 학교도, 직업도 차별받아야 하는가?”

이 조직이 바로 **형평사(衡平社)**였다.
이는 한국 인권운동사에서 최초의 조직적, 집단적, 자발적 인권운동으로 평가받는다.

 

형평사 운동 : 불평등한 세상에 항의하는 시민들

 


2. 형평사의 탄생 — 진주에서 시작된 작지만 위대한 외침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에서 백정 출신 청년 김용환, 박창호, 박봉래 등이 모였다.
그들은 사회의 차별 구조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백정 사회의 권리 회복을 위한 조직을 구상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직업이나 출신으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라는 기치를 내걸고 형평사 창립을 선언했다.

형평사란 말은 ‘형평(衡平)’ — 즉 균형과 평등을 뜻한다.
이들은 조선 사람임에도 조선 사회에서 차별받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고,
이를 단지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운동과 교육, 행동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3. 백정 차별의 현실 — 이름도, 학교도, 직업도 제한되던 삶

형평사 운동이 갖는 의의는, 단순히 소수 집단의 권리 주장에 있지 않다.
그들이 처한 현실은 차별이라기보다 체계적인 배제에 가까웠다.

  • 호적 차별: 백정은 ‘도한(屠漢)’이나 ‘천민’으로 기재됨
  • 이름 차별: 백정은 '○○이' 같은 낮춰 부르는 호칭으로 강제됨
  • 학교 차별: 백정 자녀는 보통학교 입학 자체가 거부됨
  • 취업 차별: 장터, 관공서, 군대, 금융기관 등 모든 공공 직군에서 배제
  • 혼인 차별: 비백정과의 혼인 시 절대 반대, 심지어 폭행·살인 사례도 존재

이런 현실은 공식 제도보다 더 무서운 사회적 낙인이었고,
형평사 운동은 이를 뒤엎고자 했다.


4. 활동의 확산 — 전국으로 번져간 형평운동

형평사는 단지 선언에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지부를 설치하고, 백정 자녀의 교육을 위해 야학(夜學)을 운영했으며,
매월 <형평운동>이라는 기관지를 발간하여 사회의 관심을 유도했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았다.

  • 학생 입학 차별 철폐 운동: 진주보통학교 등지에서 집단 진정서 제출
  • 호적제도 개정 요구: 백정 명칭 삭제와 개명 허가 촉구
  • 언론 대응 활동: 백정을 조롱하거나 혐오 표현한 기사에 항의 서한 발송
  • 공무원 취직 제한 철폐 요구: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응시 제한 해제 청원
  • 기독교·불교계와 연대 시도: 형평사 회원 다수가 YMCA, 사회주의 계열과 교류

형평사는 조직적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를 공개하고 정체성을 긍정하려는 ‘자존의 운동’**이었다.


5. 내부 갈등과 외부 탄압 — 무너지기 시작한 운동

하지만 운동의 전개는 순탄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내부 세력 간 갈등이었다.
형평사 내부에는 기독교 계열의 온건파사회주의 연계 급진파가 공존하고 있었고,
점차 활동 방향을 두고 이견이 깊어졌다.

두 번째는 외부 사회의 적대감이었다.
백정 차별은 너무 뿌리 깊은 것이어서, 심지어 다른 노동운동 세력들도 형평사를

“하찮은 자기 권리만을 위한 이기적 운동”
이라고 폄하하거나 외면했다.

일제 역시 형평사를 치안유지법 적용 대상으로 분류했고,
형평사 기관지에 ‘계급투쟁’, ‘사회변혁’ 같은 표현이 보이면 즉각 발행금지 처분을 내렸다.


6. 여성의 참여 — 보이지 않던 이름, 여성 형평사원들

형평사 운동의 특징 중 하나는 여성의 참여였다.
1920년대 당시 여성이 공개적으로 운동에 참여하는 사례는 드물었지만,
형평사에는 다수의 여성 회원들이 다음과 같은 역할을 했다.

  • 야학 교사
  • 기관지 편집 및 배포
  • 연설회 기획
  • 차별 사례 제보 및 기록 정리
  • 어린이 회원 교육

특히 형평사 여성지부는 차별받는 ‘두 번의 약자’로서
더욱 절실하게 운동에 몰입했고, 그들의 활동은 이후
여성노동운동, 야학운동, 민중교육운동으로도 이어졌다.


7. 해산과 그 이후 — 운동은 끝났지만 씨앗은 남았다

형평사는 1930년대 들어, 내부 분열과 외부 탄압, 자금 부족, 피로 누적으로 점차 약화된다.
1935년경, 사실상 활동 중단 상태에 이르렀고,
1938년에는 대부분의 지회가 자연 해산되었다.

하지만 이 운동이 남긴 흔적은 컸다.

  • 신분 차별 철폐 운동의 전형으로 기록
  • 대한민국 헌법 제11조(평등권)와 관련된 역사적 전거
  • 인권교육 교과서, 사회운동사 서적에 필수 인용
  • ‘조선 민중이 만든 최초의 인권단체’라는 상징성

오늘날에도 경남 진주에는 형평운동기념비와 형평운동기념관이 존재하며,
매년 4월에는 형평운동 추모제가 조용히 치러지고 있다.


8. 맺음말 — 우리는 얼마나 평등한가

형평사는 ‘위대한 운동’이기보다는
‘절실한 외침’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당당히 말하고 싶었던 이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싶었던 부모,
일하고 싶었던 청년들.
그들은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우리는 지금 그들이 꿈꿨던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형평사 운동은 여전히
우리에게 되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