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봉산 학생 동맹휴학 사건 (1927) — 조선 청년들이 던진 정의의 목소리
황해도 봉산 학생 동맹휴학 사건 (1927) — 조선 청년들이 던진 정의의 목소리
1. 사건 개요
1927년 황해도 봉산에 위치한 한 중등 교육기관에서 벌어진 학생 동맹휴학 사건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교육현장에서 벌어진 차별과 모욕에 맞선 청년들의 항거였습니다.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일본인 교사의 노골적인 조선인 비하 발언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이미 수년간 누적된 차별 교육, 조선어 억압,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 교육정책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쌓여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학교 내 갈등이 아니라,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이전에도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민족차별에 저항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2. 시대적 배경
2-1. 1920년대 후반의 조선 교육 현실
1920년대 후반, 조선은 이미 문화정치라는 이름 아래 일본의 동화정책이 본격화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교육과 문화의 발전을 허용하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황국신민화를 목표로 한 동화 교육이 강화되었죠.
- 조선어 과목 축소 : 일본어가 모든 학과의 기본 언어가 되었고, 조선어 과목은 점차 폐지되거나 선택과목으로 전락했습니다.
- 역사 왜곡 교육 : 조선 역사는 왜곡되었고, 일본 중심의 역사관이 강제되었습니다.
- 교원 구성의 불균형 : 일본인 교사가 대부분 고위직을 차지하고, 조선인 교사는 보조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2-2.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 비하
황해도 봉산의 해당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일본인 교사들은 수업 중 공공연히 조선인을 "게으르고 미개한 민족"이라고 폄하하거나,
조선 학생들의 전통과 문화를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차별 발언은 학생들의 자존심을 짓밟았고, 교내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었습니다.
3. 사건의 발단
1927년 3월, 일본인 교사 A씨가 수업 중 한 조선인 학생의 발언을 가로막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조선인은 원래 게을러서 발전할 수 없다. 일본 덕에 학교에 다니는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라."
이 발언은 교실을 얼어붙게 만들었고, 학생들 사이에서 분노가 폭발했습니다.
당시 학생회 간부들은 비밀리에 모여 집단적인 대응을 결의했고, 그 방식으로 동맹휴학을 선택했습니다.
4. 동맹휴학의 전개
4-1. 사전 준비
학생들은 즉흥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사건 발생 후 3일간 비밀회의를 열어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세웠습니다.
- 일본인 교사의 공식 사과 요구
- 조선어 수업 정상화 요구
- 일본인과 조선인 학생 간 차별 철폐
- 차별 발언 재발 방지 약속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전교생이 수업을 거부하고 등교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4-2. 첫날 시위
3월 15일, 전교생 약 200명 중 170여 명이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운동장에 모였습니다.
학생 대표는 준비한 성명서를 낭독하며,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배움을 잠시 멈춘다"**라고 선언했습니다.
4-3. 학교 측의 대응
학교 측은 즉시 파업 학생들을 교실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실패했고, 사건은 곧 황해도 교육당국과 경찰에 보고되었습니다.
일제 경찰은 사태를 '불온행위'로 규정하고 학생 대표 10명을 연행했습니다.
5. 경찰과 식민당국의 탄압
연행된 학생들은 고등경찰과 조선총독부의 심문을 받으며 강도 높은 취조를 당했습니다.
취조 과정에서 경찰은 학생들에게 배후에 독립운동 세력이 있지 않느냐며 고문에 가까운 조사를 벌였습니다.
학교 측은 연행된 학생들의 제적을 검토했고, 일부는 강제 전학이나 퇴학 조치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학생들은 끝까지 학교 복귀를 거부하며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6. 지역사회와 언론의 반응
6-1. 지역 청년단체의 연대
봉산 지역의 청년단체와 일부 종교단체가 학생들을 지지하며 구호품과 격려 서신을 보냈습니다.
특히 기독교계와 천도교계 청년들은 "이 싸움은 우리 모두의 싸움"이라며 연대 집회를 열었습니다.
6-2. 언론 보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 사건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다만 일본 당국의 검열로 인해 '차별 발언' 부분은 삭제되거나 완곡하게 표현되었습니다.
7. 사건의 종결과 여파
약 한 달간의 동맹휴학 끝에, 학교 측은 일부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새를 취했습니다.
- 일본인 교사의 인사 이동
- 조선어 수업 시수 일부 복원
- 차별 발언에 대한 구두 사과
그러나 연행되었던 학생들 중 절반은 끝내 학교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지역 학생운동의 불씨를 남겼고,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이어지는 전국적 학생 저항 흐름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8. 역사적 의의
- 학생 항일운동의 확산
광주학생운동 전에도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이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웠다는 증거입니다. - 민족의식 고양
일본인 교사의 발언은 학생들의 민족 자존심을 자극했고, 이는 향후 독립운동 참여로 이어졌습니다. - 지역사회 연대
학생운동이 단순한 교내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의 문제로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9. 오늘날의 교훈
황해도 봉산 학생 동맹휴학 사건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 교육 현장에서의 차별과 편견은 반드시 근절되어야 함
-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사회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음
- 불의에 맞서 연대하는 힘이 역사를 바꾼다는 점
10. 결론
1927년 황해도 봉산의 학생들이 보여준 용기와 연대는, 그 당시에는 작은 물결일지 몰라도 조선 독립운동사의 흐름 속에서는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학업보다 자존심을, 두려움보다 정의를 선택했고, 그 불씨는 이후 수많은 학생과 청년의 가슴 속에서 타올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