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과서 항의 사건 — 침묵을 거부한 조선의 여학생들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과서 항의 사건 — 침묵을 거부한 조선의 여학생들
서론 — 조선 여성, 침묵을 거부하다
1939년. 일제의 식민지배가 극에 달하던 시기,
경성의 한 전문학교에서 조선 여성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침묵을 깨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들은 군홧발 아래서 공부하는 여학생들이었고, 의술을 배우는 학도들이었다.
이 사건은 일제 강점기 후반,
국가주의적 교과서 강제 도입에 항의한 여학생들의 집단 퇴장 및 시위 사건으로,
조선 여성의 독립된 지성적 저항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언론 보도는 철저히 통제되었고,
사건 이후 가해진 징계는 무겁고 잔혹했지만,
그 기록은 현재까지 조선 여성 지식인의 양심으로 남아 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는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유일하게 여성에게 전문적인 의학교육을 허용한 교육기관이었다.
1938년에 설립된 이 학교는
의사 면허를 가진 여성 인재를 양성한다는 명목으로 세워졌으나,
사실상 일본 내 군의계 및 제국주의 의료체계에 조선 여성을 편입시키려는 목적이 더 컸다.
학생들은 일본어로 교육받았으며,
교과서 또한 전량 일본 본토에서 수입되거나 일본이 편찬한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
그 중심에는 ‘황국신민의 도(道)’, 즉 천황에 대한 충성과 무조건적인 복종을 강요하는
사상 교육이 포함되어 있었다.
교과서 문제의 본질 — 교육인가, 세뇌인가
1939년 사건의 직접적인 계기는
학교 측이 강제로 도입한 **‘황국신민 교과서’와 ‘대동아의학개론’**이라는 교재였다.
이 교과서들은 단순한 의학지식이 아니라,
- 천황에 대한 충성 맹세
- 일본 우생학 중심의 인종 이론
- 일본 의료체계 우월성 강조
- 조선 여성의 ‘제국 군인을 위한 간호병’ 역할 강요
를 주요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그 교과서에서
**‘조선인은 일본인의 신체적 하위 존재’**라는 표현을 접하며
분노와 자괴감을 느꼈다.
특히 ‘조선 여학생은 황국신민의 아내이자 자궁이다’라는 표현은
여성 인권에 대한 모욕 그 자체였다.
항의의 시작 — 집단 수업 거부
1939년 10월, 의학전문학교의 2학년과 3학년 학생들 일부가
수업 중 해당 교과서 사용을 거부하고 집단 퇴장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들은
- 교과서 반납
- 담당 교수에게 의견서 제출
- 학내 자치회의를 통해 사과 요구
등을 통해 조용하지만 강력한 저항을 시도했다.
학생 중 일부는 손으로 직접 쓴 항의문을 교내에 부착했고,
수업 시간에 “우리는 인간이다. 황국신민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교재에 대한 불만이 아닌,
조선 여학생들이 일본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사례였다.
일제의 대응 — 징계, 구금, 그리고 기록 말살
경찰은 사건 직후 교내에 헌병대와 경찰을 투입하여
학생 자치위원회 인사와 대표 학생들을 연행했다.
주요 대응 내용은 다음과 같다:
- 8명 구류 후 훈방
- 3명 무기정학
- 1명 강제 자퇴
- 나머지 학생들에겐 일본어 복창훈련 강제
교장은 총독부 지시로 해임되었고,
학교는 ‘황국신민화 교육 강화 조치’를 취했다.
이후 이 사건은 공식 연감과 학사일지에서 삭제되었으며,
일본 측 기록에는 ‘불온 사상 선동 혐의’ 정도로 간단히 적혀 있다.
이 사건이 던지는 역사적 의미
- 조선 여성 지식인의 집단 지성 저항 사례
- 남성 중심 독립운동 서사에 가려졌던 여성 주체의 행동.
- 식민지 교육정책의 실체 폭로
- 교과서 하나로 식민지 이념을 주입하려는 시도에 대한 내부 반발.
- 언론통제와 역사말살의 전형 사례
- 공식 기록에서 지워졌지만, 일부 졸업생 수기와 증언으로 복원됨.
- 의학과 과학의 정치적 도구화에 대한 저항
- 과학도구를 통해 조선을 차별하고 여성의 도구화를 시도한 일제의 실체를 드러냄.
생존자의 증언 — “우리는 겁이 나지 않았다”
해방 후, 일부 생존 학생들이
이 사건에 대해 남긴 증언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의술을 배운 건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지,
일왕에게 무릎 꿇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 날 교실 밖에 서 있던 그 공기,
지금도 기억납니다. 두려웠지만 우리는 옳았습니다.”
이 기록들은 지금도 서울여자의과대학의 구 교정에 남아 전해지고 있으며,
2010년대 이후 역사교육 현장에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마무리 — 잊힌 저항을 되새기며
1939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과서 항의 사건은
단순한 교육 현장의 해프닝이 아니다.
이 사건은
- 일제의 동화정책
- 여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배
- 식민 교육의 폭력성
에 대한 집단적 ‘거부의 목소리’였다.
역사는 이 사건을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다시 조명할 때,
그들은 다시 ‘사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