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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거제 포로수용소 폭동 사건 (1952년) — 전쟁의 그늘 속에서 터져 나온 포로들의 집단 저항

by skillplanner80 2025. 8. 17.

거제 포로수용소 폭동 사건 (1952년) — 전쟁의 그늘 속에서 터져 나온 포로들의 집단 저항

1. 사건 개요

1952년 5월 7일, 경상남도 거제도에 위치한 미군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및 중국군 포로들이 주도한 대규모 폭동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수용소 내 소요를 넘어, 한국전쟁 당시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던 중대한 사건이었다.
당시 포로들은 열악한 대우와 강제 전향 시도, 정치적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 조직적인 집단행동을 벌였고, 미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거제 포로수용소 폭동 사건 (1952년)

 


2. 배경

2.1 한국전쟁과 포로 문제

1950년 6월 발발한 한국전쟁은 수많은 전투와 전선을 오가며 막대한 전쟁포로를 발생시켰다.
거제 포로수용소는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수용소로, 약 17만 명의 북한군·중국군 포로가 수감되어 있었다.

당시 국제법상 포로의 권리는 제네바 협약에 따라 보장되어야 했으나, 현실은 크게 달랐다.
특히 미국과 유엔군은 북한군 포로들의 '반공 전향'을 유도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에 반발하는 포로들과의 갈등이 점점 심화됐다.

2.2 이념적 대립과 내부 조직화

수용소 내부에는 이미 강력한 친공산주의 조직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북한정권과 중국 공산당의 지령을 받고, 수용소 내 질서 유지나 내부 규율까지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반공 포로들과의 충돌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3. 사건의 전개

3.1 촉발

1952년 5월 초, 미군 당국은 포로들을 대상으로 개별 면담과 전향 설득을 강화했다.
이에 반발한 포로들은 집단적으로 면담을 거부하고, 수용소 내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다.
포로 대표들은 △포로에 대한 학대 중단 △전향 강요 철폐 △북한·중국 송환 보장 등을 요구했다.

3.2 5월 7일, 폭동 발발

그날 오전, 미군이 포로 지도부를 체포하려 하자, 수천 명의 포로들이 저항하며 미군을 포위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들이 미군 장교를 인질로 잡는 사태가 발생했다.
미군은 이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진압 명령을 내렸다.

3.3 무력 진압

진압 과정에서 미군은 최루탄, 기관총, 장갑차까지 동원했고, 포로들도 돌, 쇠파이프, 심지어 자제 제작한 창과 방패로 맞섰다.
격렬한 충돌 끝에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인질로 잡혔던 미군 장교는 수 시간 뒤 풀려났으나, 상황은 이미 국제적으로 확산되었다.


4. 국제적 파장

4.1 미군의 이미지 타격

당시 사건은 국제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특히 **'포로 학대'**와 '인권 침해' 의혹이 제기되면서, 미국의 도덕적 명분이 크게 흔들렸다.
소련과 중국은 이 사건을 선전 도구로 활용해, 미국을 '인권 탄압국'으로 규탄했다.

4.2 휴전 협상에 미친 영향

폭동 사건은 1951년부터 이어지고 있던 판문점 휴전 협상에도 변수가 되었다.
북한과 중국은 이를 근거로 '모든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하라'고 강하게 주장했으며, 미국은 '자유의사에 따라 송환' 원칙을 고수했다.
결국 포로 송환 문제는 휴전 협상의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5. 포로들의 삶과 증언

5.1 폭동에 참여한 포로들의 이야기

이후 생존한 일부 포로들은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이 "살기 위해 저항한 필사적인 행동"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들은 식량 부족, 위생 불량, 폭력적 대우를 주된 이유로 꼽았다.

5.2 반공 포로의 시각

반면, 수용소 내 반공 포로들은 이번 사건이 "공산주의 세력의 선동"이라고 주장했다.
즉, 북한군 포로 지도부가 폭동을 의도적으로 유도해 미군을 곤경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6. 사건 이후

6.1 강경책 전환

폭동 이후 미군은 포로수용소를 철저히 분리·통제했다.
친공 포로와 반공 포로를 완전히 격리하고, 내부 무장을 철저히 금지했다.

6.2 역사적 평가

거제 포로수용소 폭동 사건은 단순한 '수용소 소요'가 아니라, 한국전쟁의 이념 대립과 냉전 구도의 축소판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포로 인권 문제와 국제법의 허점을 보여준 사례로도 꼽힌다.


7. 현재의 의미

오늘날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지는 관광지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의 상흔과 함께, 당시 포로들의 고통과 국제정치의 복잡한 계산이 얽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전쟁이 끝나도 상처가 오래 지속됨을 보여주며,
무력과 폭력이 아닌 대화와 인권 존중의 중요성을 다시금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