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예비검속 학살 사건 (1950년 6~8월)
— 전쟁의 혼란 속에서 되풀이된 비극
1. 사건 개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정부와 군·경 당국은 전쟁 초기 북한군의 급속한 남하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예비검속’**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간인 구금 작전을 실시했다.
이는 전시 상황에서 잠재적 ‘좌익 세력’이나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사전에 구금·처형함으로써 후방의 치안을 확보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상은 법적 절차 없이 이뤄진 불법 체포와 즉결 처형이었다.
제주도는 이미 1948년 4·3 사건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된 상태였고, 당시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좌익 혐의자 명단이 작성되어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 명단이 그대로 활용돼, 수천 명의 주민이 구금되고 그중 상당수가 총살되었다.
이 사건은 1950년 6월~8월 사이 제주 전역에서 발생했으며, 4·3 사건 이후 불과 2년 만에 또다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비극이었다.
2. 역사적 배경
2-1. 4·3 사건의 상흔
-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봉기가 시작되면서 군·경과 우익 세력이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
- 이 과정에서 **‘빨갱이 숙청’**이라는 명분 아래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됐다.
- 4·3 사건 이후 제주도 인구의 10% 이상이 줄었고, 살아남은 사람들 중 다수는 좌익 전력자 가족 혹은 동조자 의심자로 분류됐다.
2-2. 전쟁 발발과 ‘예방 검속’ 정책
-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하자, 정부는 후방 치안 유지와 정보 유출 방지를 이유로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자 명단’**을 토대로 검거 작업을 시작했다.
- 특히 제주도는 **전국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분류돼, 검속 규모가 다른 지역보다 훨씬 컸다.
- 전쟁 전 이미 4·3 사건 당시 작성된 좌익·동조자 명부가 존재했기에, 경찰은 이를 재활용했다.
3. 사건 전개
3-1. 체포 작전
- 1950년 6월 말부터 경찰과 우익단체는 각 마을에 들이닥쳐 사전에 작성된 명단을 근거로 사람들을 체포했다.
- 이들은 ‘보안서’(경찰서)나 임시 구금소, 학교 교실, 창고 등에 감금됐다.
- 공식적인 혐의 고지나 재판 절차 없이 사전 검속 명단만으로 구금이 결정됐다.
3-2. 집단 처형
- 구금된 이들 중 일부는 며칠 뒤 트럭에 실려 해안가, 절벽, 군부대 인근, 하천 주변 등으로 이송됐다.
- 그곳에서 총살 후 암매장됐다.
- 대표적 학살지는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 성산 일대 해안 등이었다.
3-3. 희생자 규모
- 제주4·3평화재단과 관련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최소 2,000~3,000명이 예비검속으로 체포됐고, 그 중 상당수가 사살됐다.
- 구체적 피해 규모는 여전히 불확실하며, 일부 연구자는 최대 6,000명까지 추정하기도 한다.
4. 주요 학살 사례
4-1. 섯알오름 집단 학살
- 서귀포시 대정읍 알뜨르 비행장 인근 섯알오름은 대표적인 집단 학살지다.
- 수백 명이 끌려와 구덩이 앞에 세워진 뒤 기관총 사격을 당했다.
-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총격 후에도 숨이 붙어 있는 사람은 군인들이 다시 확인 사살했다.
4-2. 북촌리 해안 학살
- 4·3 사건 당시 이미 참극을 겪었던 북촌리 주민 일부가 또다시 희생됐다.
- 마을 어귀에서 끌려나와 해안에서 사살되고 시신은 바다에 던져졌다.
4-3. 성산포 사건
- 성산포 일대에서는 해변가에서 수십 명이 총살된 뒤 모래사장에 암매장됐다.
- 파도에 시신이 떠밀려와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5. 사건의 특징
- 사전 명단에 의한 검속
- 4·3 사건 당시 작성된 좌익 연루자 명부가 재활용됐다.
- 법적 절차 완전 무시
- 기소, 재판, 변호인의 변론 없이 즉결 처형.
- 전국적 예비검속의 극단 사례
- 같은 시기 영덕, 통영, 보도연맹 사건 등 다른 지역에서도 예비검속 학살이 있었지만, 제주도는 규모와 빈도가 가장 심했다.
- 전쟁과 4·3의 연결 고리
- 4·3 피해자와 그 가족이 다시 표적이 됐다.
6. 전후 은폐와 침묵
전쟁 후 이 사건은 철저히 은폐됐다.
- 희생자 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을 두려워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국가기록원이나 군 기록에도 구체적인 학살 명령서, 피해자 명단은 남아 있지 않았다.
- 일부 피해자 가족은 수십 년 동안 가족의 행방조차 모른 채 살아야 했다.
7. 진상 규명 노력
7-1. 1980~90년대의 변화
- 민주화 이후 일부 유족과 연구자들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 그러나 ‘예비검속 학살’이라는 용어조차 사회적으로 금기였다.
7-2. 제주4·3특별법과 연계 조사
- 2000년대 제주4·3특별법 제정 이후, 4·3 사건 조사 과정에서 1950년 예비검속 학살도 함께 다뤄졌다.
- 진상조사보고서에는 이 시기 희생자가 수천 명에 달하며, 이는 명백한 국가 폭력임이 명시됐다.
8. 오늘날의 의미
- 전쟁기 민간인 보호의 실패
- 전시 상황이라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은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 과거사 청산의 필요성
- 4·3 사건과 예비검속 학살은 제주 지역 집단 트라우마의 핵심이다.
- 기억과 교육
- 제주4·3평화공원 등에서 이 사건을 함께 전시·교육함으로써, 재발 방지의 교훈을 전한다.
9. 결론
제주 예비검속 학살 사건은 4·3 사건으로 인한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되풀이된 국가 폭력이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비극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자의적 폭력이 어떻게 민간인의 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오늘날 이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다시는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약속이자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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