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1년 2월)
— 전쟁의 비극 속에서 기록된 민간인의 피울음
1. 사건 개요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소속 부대는 빨치산 토벌 작전을 수행한다는 명목 아래, 신원면의 주민 수백 명을 모아놓고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
이 사건은 피해자의 대부분이 노인, 여성, 어린이였다는 점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피해의 참혹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군 당국은 이들을 빨치산에 협조한 혐의로 몰았으나, 후일 조사 결과 상당수가 무고한 민간인이었음이 밝혀졌다.
희생자는 약 719명(공식 기록 기준)으로 알려져 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1,000명에 육박한다는 증언도 있다.
2. 역사적 배경
2.1 한국전쟁의 양상과 빨치산 활동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전선이 남북을 오가며 남한 후방에는 북한군 잔여 세력과 남로당 계열 빨치산들이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경남·지리산 일대는 빨치산의 거점으로, 미군과 국군은 이 지역을 집중 토벌 지역으로 설정했다.
2.2 국군의 ‘토벌 작전’과 민간인 피해
빨치산 토벌 작전은 군사적 성과와 별개로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는 무차별 작전을 낳았다.
군은 빨치산 은신처를 색출한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을 불러내 심문하거나, 피난민 행렬을 공격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거창군 신원면 역시 지리산과 가깝고 험준한 산악 지형을 지녀, 빨치산 활동이 잦았던 지역이었다.
이는 군이 해당 지역 전체를 **‘잠재적 적지’**로 판단하게 만든 배경이 됐다.
3. 사건의 전개
3.1 작전 명령
1951년 2월 초, 제11사단 9연대 3대대는 상부로부터 신원면 일대 빨치산 토벌 명령을 받았다.
작전의 목표는 ‘빨치산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민간인 중 협력자를 색출’하는 것이었다.
3.2 주민 소집
부대는 마을에 공문과 구두 명령을 내려, 주민들에게 “전투에 방해되지 않도록 집결하라”고 지시했다.
신원초등학교 운동장과 인근 들판으로 주민들이 모였고, 여기에는 갓난아기를 업은 어머니, 지팡이를 짚은 노인,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 포함됐다.
3.3 무차별 학살
군은 주민들을 성별·연령별로 분류한 뒤, 일부를 심문하였으나 대부분 별다른 혐의가 없음에도 사살 명령을 내렸다.
사살 방식은 집단 사격이었다.
일부는 들판에서, 일부는 계곡이나 구덩이에서 총살당했다.
3.4 피해 규모
- 공식 통계 : 719명 사망
- 피해 구성 : 남성 성인 385명, 여성 249명, 어린이 85명
- 비공식 증언 : 최대 1,000명 이상 희생
4. 사건 직후의 상황
4.1 은폐 시도
군은 사건 직후 “빨치산 협력자 처형”이라고 발표하며, 작전 성과로 포장했다.
시신 수습은 허용되지 않았고, 유족들은 며칠 후 몰래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4.2 지역의 침묵
군·경의 감시와 보복 우려로 인해, 사건의 진상은 지역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거론되지 못했다.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낙인 때문에 오랫동안 피해를 호소할 수 없었다.
5. 진상 규명 과정
5.1 국회 조사
사건 발생 직후 일부 국회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1951년 4월 국회 양민학살사건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조사단은 현지 조사와 증언을 통해 무고한 민간인이 대거 학살당했음을 확인했다.
5.2 군의 반발과 조사 중단
그러나 군은 “전시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조치”라며 조사에 협조하지 않았다.
결국 국회 보고서는 채택되지 못하고, 진상 규명은 중단됐다.
5.3 재조명과 재심
1980년대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거창 사건이 재조명됐다.
1990년대 이후 국가기관 차원의 재심과 유족회 활동이 본격화되었고, 2004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공식적으로 무고한 민간인 학살임을 인정했다.
6. 피해자와 유족의 삶
6.1 사회적 낙인
피해자 가족들은 전후 수십 년 동안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을 썼다.
취업·교육에서 차별을 받았고, 지역 사회에서도 소외당했다.
6.2 심리적 상처
유족들은 가족을 눈앞에서 잃은 트라우마와 생계 붕괴로 평생 고통 속에 살았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살아남은 어린이들은 총성과 비명 소리를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한다.
7. 현재의 기억과 기념
7.1 거창사건추모공원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는 거창사건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위령탑, 기록관, 유해 발굴 장소 등이 보존되어 있으며, 매년 2월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7.2 교육과 역사 인식
거창 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의 대표 사례로, 역사 교육과 인권 교육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에서는 사건의 성격과 피해 규모를 둘러싸고 논쟁이 존재한다.
8. 사건의 의미와 교훈
8.1 전시 인권의 부재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전시라는 특수 상황에서 인권이 얼마나 쉽게 무시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8.2 국가 폭력에 대한 책임
무고한 민간인 희생에 대해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은 정의 회복의 출발점이다.
8.3 평화와 화해의 필요성
전쟁의 참혹함을 기억하고, 유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교육해야 한다.
9. 결론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전시 국가 폭력, 민간인 보호의 부재, 진상 은폐라는 세 가지 문제를 동시에 보여준다.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같은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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