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사건 (1950년 7월) — 은폐된 비극, 드러난 진실
1. 사건 개요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 사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도교와 인근 쌍굴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경북 칠곡과 왜관 일대에서 피난하던 수백 명의 주민들이 미군의 공중·지상 공격을 받아 사망했으며, 희생자의 상당수는 무기를 들지 않은 노인, 여성, 어린이였다.
이 사건은 50여 년간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1999년 미국 AP통신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한국 사회와 국제 사회 모두에 큰 충격을 주었고, 전쟁 상황에서의 민간인 보호 문제를 환기시킨 대표적 사건이 되었다.
2. 역사적 배경
(1)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군의 참전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소련제 전차와 포병 지원을 받으며 38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과 경찰, 그리고 초기 투입된 미군은 급격히 후퇴했다.
유엔군 사령부는 미군 지상군을 한국 전선에 급파했고, 7월 중순 무렵 미군 제1기병사단이 경북·충북 일대에 진입했다.
(2) 피난민에 대한 불신 심화
북한군은 후방 교란을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한 특수부대를 투입했고, 실제로 피난민 행렬 속에서 무기를 숨기고 기습을 가하는 사례가 보고되었다.
이로 인해 미군 지휘부는 **"군사 작전 지역에 접근하는 피난민 행렬을 차단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일부 기록에는 "필요시 사격 가능"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나온다.
(3) 노근리 지역의 군사적 위치
노근리는 당시 경부선 철도가 지나던 전략적 요충지로, 후방 병참선과 연결되는 교통의 관문이었다. 이 지역을 통과하는 피난민 행렬은 미군의 경계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3. 사건의 발단
1950년 7월 하순, 경북 칠곡·왜관 일대 마을 주민들은 미군의 안내를 받아 남쪽으로 피난을 시작했다. 그중 약 500여 명이 노근리 인근 철도교 방향으로 이동했다.
당시 이들은 대부분 짐 보따리를 들거나 등에 아이를 업고 있었으며, 노인과 부녀자가 다수를 차지했다.
피난 행렬은 미군의 검문을 거친 뒤, "다리를 건너면 안전하다"는 안내를 받고 노근리 철도교 인근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는 참혹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4. 사건 전개 — 시간대별 재구성
7월 25일 — 의심과 첫 번째 공격
피난민 행렬이 철도교 인근에 도착하자, 상공을 선회하던 미군 전투기가 기총 사격을 가했다. 증언에 따르면, 한 차례 사격 후 다시 돌아와 반복 공격을 했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공습 직후 미군은 생존자들을 철도교 아래와 인근 쌍굴로 몰아넣었다.
7월 26~27일 — 쌍굴 속의 공포
굴 안에 모인 피난민들은 식량과 물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버텨야 했다. 굴 입구 양쪽에는 미군이 기관총을 설치하고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사살했다.
밤이 되면 굴 속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7월 28~29일 — 절망과 죽음
사격과 포격은 사흘 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졌고, 굴 내부의 시신은 쌓여만 갔다. 부상자는 출혈과 탈수로 사망했고, 일부는 고통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증언도 있다.
29일, 미군이 철수하면서 살아남은 일부만이 굴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총격은 멈추지 않았다.
5. 피해 규모와 참상
(1) 사망자 수 논란
- 한국 정부 공식 조사(2005): 최소 163명 사망
- 유족 및 생존자 증언: 300~400명 이상 사망
(2) 희생자의 특성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성·아동·노인이었고, 군사적 위협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발견된 유해 중 상당수는 총상, 폭발상, 그리고 탈수·기아로 인한 사망 흔적을 보였다.
6. 사건 은폐와 긴 침묵
(1) 전쟁 후의 침묵
한국전쟁 직후 반공주의와 미군 의존이 절대적인 국가 정책이었던 시절, "미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발언은 곧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위험을 의미했다.
유족과 생존자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사건은 지역의 ‘금기’가 되었다.
(2) 유족들의 진실 추적
1980~90년대 들어 일부 생존자들이 용기를 내 증언을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사건을 기록한 미국 병사들의 회고록, 당시 사진, 군 기록 일부가 발견되었다.
7. AP통신 보도와 국제적 파장
1999년 9월, 미국 AP통신은 1년 이상의 취재 끝에 **〈Bridge at No Gun Ri〉**라는 제목의 특종 보도를 발표했다.
이 보도는 미군 참전용사들의 증언과 군 문서를 토대로, 노근리에서 미군이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반응
- 미국: 국방부는 초기 부인 → 조사 후 ‘유감’ 표명, 그러나 공식 사과·배상 거부
- 한국: 언론·시민사회가 사건 진상규명 운동 전개, 유족회 결성
8. 진상규명과 기념사업
(1) 한국 정부 조사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미군이 군사적 위협이 없는 민간인을 사살한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2) 기념관 건립
충북 영동군에는 노근리평화공원과 기념관이 조성되어, 희생자 추모와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9. 사건의 의미
- 전쟁범죄: 무고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공격
- 기억과 기록: 반세기 넘게 묻혀 있던 진실이 드러난 상징적 사례
- 국제인권의 경고: 전쟁 상황에서도 민간인 보호 원칙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줌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 예비검속 학살 사건 (1950년 6~8월)— 전쟁의 혼란 속에서 되풀이된 비극 (5) | 2025.08.17 |
---|---|
산청·함양·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1951) — 전쟁의 참극 속에 지워진 이름들 (2) | 2025.08.16 |
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1년 2월)— 전쟁의 비극 속에서 기록된 민간인의 피울음 (3) | 2025.08.16 |
전남 신안 어민 해상시위 사건 (1936)— 바다 위에서 울려 퍼진 항일의 함성, 일본 어업 독점에 맞선 어민들의 투쟁 (5) | 2025.08.15 |
황해도 봉산 학생 동맹휴학 사건 (1927) — 조선 청년들이 던진 정의의 목소리 (4) | 2025.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