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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경성여자상업학교 학생 시위 사건 (1936)― 언어를 지키려는 소녀들의 결단과 항거

by skillplanner80 2025. 8. 10.

경성여자상업학교 학생 시위 사건 (1936)

― 언어를 지키려는 소녀들의 결단과 항거


1. 사건의 서막 — 잃어버리는 ‘말’에 대한 불안

1936년, 경성여자상업학교(京城女子商業學校)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운영·감독하던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이 학교는 상업 인력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지만, 설립 초기와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교육 내용이 민족교육과는 거리가 먼, 철저히 식민 통치에 맞춘 프로그램으로 재편되었다.

1930년대는 황국신민화 정책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다. 일제는 학교 교육에서 일본어를 중심으로 모든 수업을 진행했고, 조선어 과목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 조선어 시수 축소 → 주 4시간 → 2시간 → 주 1시간 → 선택 과목
  • 시험 과목에서 조선어 제외
  • 조선어 교원 감원 및 일본인 교사 대체

학생들은 점점 줄어드는 조선어 수업을 보며 **“우리가 졸업할 때쯤이면 학교에서 우리말을 완전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특히, 언어가 곧 정체성이라는 인식은 당시 청년 지식층과 학생들 사이에서 매우 강했다.

경성여자상업학교 학생 시위 사건(1936)


2. 당시 사회와 교육 현실

1930년대 중반은 일본의 **만주사변(1931)**과 그 이후 만주국 건국(1932)으로 군국주의가 확산하던 시기였다. 조선에서도 이에 발맞춰 사상 검열, 언론 통제, 교육 개편이 강화됐다.

  • 교육령 개정(1936년):
    • 일본어를 모든 학년, 전 교과의 기본 언어로 규정
    • 조선어 교육은 ‘보통학교’ 수준에서만 유지, 그마저도 ‘필수’에서 ‘선택’으로
    • 역사·지리 과목은 일본 중심으로만 서술, 조선사는 한 학기나 일부 단원에만 편성
  • 교내 규율:
    • 아침 조회 시 일본 국가 ‘기미가요’ 제창
    • ‘황국신민서사’ 암송 의무화
    • 학교 행사에서 일본 군인·관료의 강연 필수 청취

여성 교육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오히려 여학교는 ‘순종적이고 충성스러운 황국신민 여성’을 길러내는 장치로 적극 활용됐다.


3. 경성여자상업학교의 변화와 학생들의 불만

1936년 초, 경성여자상업학교 교무회의에서 ‘1936년도 학사 운영 방침’이 발표됐다. 여기에는 조선어 과목의 시수를 1학년 주 2시간, 2·3학년 주 1시간으로 줄이고, 일본어 수업 시수를 50% 이상 확대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조선어 교사 김OO(가명)는 회의에서 반발했으나, 일본인 교장과 일본인 교사 다수가 찬성하여 그대로 확정됐다. 학생들의 불만은 빠르게 퍼졌다.

  • 3학년 A양(당시 18세): “우리말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건, 우리를 일본인으로 만들겠다는 거다.”
  • 2학년 B양: “상업 실무를 배우러 왔지만, 조선어로 된 장부조차 안 가르치겠단다.”

4. 비밀 모임과 시위 준비

당시 학생들은 공개적으로 항의할 수 없었기에 **‘자치회’와 ‘독서회’**를 명목으로 모임을 열었다.
이 모임에서 나온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1. 조선어 시수 축소 철회 요구
  2. 조선어 교사 복직 요구
  3. 일본어 강제 수업 거부

학생 대표단은 ‘항의문’을 작성했고, 다음 문구가 들어갔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혼입니다. 혼을 빼앗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말 수업을 돌려받고자 합니다.”


5. 1936년 4월의 시위

1936년 4월 15일 오전 10시, 2교시 일본어 시간이 시작되자 3학년 80여 명이 교실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이어 2학년 일부도 합류했다.
이들은 운동장으로 모여들어 “우리말을 지켜라”, “조선어 수업을 돌려달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 참가 인원: 약 120명
  • 시위 시간: 약 40분
  • 주요 구호: “조선어 보존”, “민족교육 사수”
  • 상징 행동: 일본어 교과서를 땅에 내려놓고 발로 밟는 퍼포먼스

당시 상황을 본 한 일본인 교사는 나중에 보고서에 “여학생들의 행동이 마치 사전에 훈련된 병사들 같았다”고 기록했다.


6. 경찰과 학교의 탄압

시위가 시작된 지 20분 만에, 인근 종로경찰서 소속 일본인 형사와 조선인 순사들이 학교에 들이닥쳤다.

  • 주동자 12명: 즉시 교무실로 연행
  • 나머지 학생: 강제 해산, 기숙사·가정에 격리
  • 조선어 교사 김OO: 그날 오후 해임 통보

총독부는 이 사건을 ‘불온한 사상적 선동’으로 규정하고, 학교에 경고장을 발송했다.


7. 체벌·징계와 그 후

연행된 학생 중 8명은 며칠간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고, 일부는 구타와 강압적 심문을 당했다.

  • 퇴학: 5명
  • 무기정학: 7명
  • 근신: 30여 명

이후 학교는 ‘학생 사상 지도 강화’라는 명목으로 매주 ‘황국신민서사’ 암송 시험과 일본어 연설대회를 개최했다.


8. 언론의 보도

당시 조선의 일부 신문은 이 사건을 간접적으로 보도했다.

  • 《조선중앙일보》: “일부 여학교에서 교과 개편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
  • 《동아일보》: “여학생들의 의식 수준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으며, 언어 문제에 대한 관심이 깊다.”
    이러한 보도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곧 삭제되거나 축소되었다.

9. 사건의 역사적 의의

이 사건은 여학생이 주체가 된 항일 시위라는 점에서 드물고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언어권 투쟁의 사례
  • 여성 교육과 민족운동의 결합
  • 이후 다른 학교(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 영향을 미침

10. 오늘의 교훈

우리가 자유롭게 한국어를 쓰고 배우는 것은, 이런 시기 목숨을 걸고 지킨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성여자상업학교의 학생들은 단순히 수업 시수를 되돌리려 한 것이 아니라, 민족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