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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수양동우회 사건 (1937) – 사상 탄압과 민족 계몽운동의 비극적 종말

by skillplanner80 2025. 8. 6.

수양동우회 사건 (1937) – 사상 탄압과 민족 계몽운동의 비극적 종말

"사상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일제는 그것조차 두려워했다."
1937년, 조용히 사회를 바꾸려 했던 지식인들이 일제의 철퇴 아래 무참히 쓰러졌습니다.
이 사건은 ‘폭력적 투쟁’도, ‘무장 저항’도 아닌 지식인의 말과 글이 총칼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입증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양동우회 사건’**입니다.

수양동우회 사건


1. 수양동우회란 무엇인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는 1921년 조선의 지식인들이 주도한 계몽운동 단체로,
민족의 내면 수양을 통해 독립의 자질을 기르자는 철학 아래 만들어졌습니다.
‘수양’은 자기 수련, 인격 향상, 민족 도덕 회복을 뜻하며, 폭력이 아닌 지속 가능한 사회 변화와 민족 의식의 제고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주요 인물

  • 안재홍: 수양동우회 창립자, 언론인·정치인이자 민족주의 계몽가
  • 장건상, 윤길중, 조헌영 등 당대 대표적 문화민족주의자들이 포진

활동 방향

  • 청년을 대상으로 한 강연회, 독서회, 토론회
  • '민족개조', '내면혁명'을 위한 출판 활동
  • 대중 계몽을 통한 식민 통치 체제 극복 시도

수양동우회는 무장을 들지 않았지만, ‘조선인의 정신적 독립’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일제에겐 위협이 되었습니다.


2. 사건의 배경: 일본의 중국 침략과 사상 검열 강화

1930년대 후반, 일본은 만주사변(1931)을 시작으로 중일전쟁(1937)에 돌입하며 침략 전쟁을 본격화했습니다.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 내부의 사상과 언론을 철저히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민족주의자나 계몽운동가조차 ‘비국민’으로 몰아가기 시작합니다.

  • 치안유지법의 개정 → 사상·집회·표현의 자유 전면 차단
  • 문화운동조차 위험 사상으로 간주, 민족주의계 인물 대거 검거

수양동우회는 무력 투쟁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지식인 조직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1937년 결국 일제는 이 조직을 강제 해산시킵니다.


3. 사건의 발발: 대규모 검거와 ‘사상범’ 몰이

1937년 3월부터 4월까지, 일제는 수양동우회 간부 및 회원 50여 명을 일제히 체포합니다.
이들은 모두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융합을 통한 국가전복 기도 혐의’**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기소됩니다.

  • 안재홍은 “민족주의 사상을 퍼뜨리고 일제 지배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이유로 구속
  • 회원 중 일부는 **‘검거 후 고문으로 전향서 작성’**을 강요당함
  • 조선의 언론·교육계 대표 인물 다수 검거, 출판물은 즉시 금서로 지정

사건의 핵심은, 말과 글로 조선을 바꾸려던 사람들을 '국가 전복세력'으로 낙인찍은 정치적 탄압이었습니다.


4. 일제의 논리: ‘사상은 총보다 위험하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일제 경찰이 사상범 단속을 체계화하기 위한 구실이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 전역의 독서회, 토론회, 야학, 강습회 등 모든 형태의 민간 자치 모임이 해산되거나 감시를 받게 됩니다.

일제는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생각하지 말라. 조직하지 말라. 모이지 말라.”

이는 곧 조선 지식인 사회 전체를 침묵시키는 거대한 검열의 시작이었고,
문화운동·비폭력 민족주의·종교계 자치조직까지 모두 ‘치안유지법 적용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5. 사건 이후의 영향: 조선 지식인의 침묵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조선의 지식계는 극심한 자기검열과 침묵의 시기로 진입하게 됩니다.

  • 신문·출판사 편집인들이 줄줄이 구속되거나 사직
  • 교사, 목회자, 강연자들이 수업과 강의에서 민족주의 주제를 피함
  • 계몽운동이 중단되고, 황국신민화 교육이 확산

무력 투쟁 없이도 독립에 이르는 길을 모색하던 ‘비폭력 문화민족주의’의 마지막 희망이 꺾인 순간이 바로 이 사건이었습니다.


6. 잊혀진 이름들: 후속 조명과 재평가

광복 이후에도 수양동우회 사건은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이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무장 독립운동가도 아닌 ‘중도 지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음과 같은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 ‘지식인의 저항’이 무장 투쟁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짐
  • 1930년대 후반 사상통제 시기를 대표하는 비폭력 탄압의 상징적 사건
  • 민족주의 계몽운동의 단절 지점으로서의 역사적 가치

특히 안재홍은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이자 초대 내무차관을 지내며 해방 이후 민주주의 기반을 닦은 인물로도 평가받습니다.


7. 오늘날 수양동우회 사건이 갖는 의미

우리는 ‘혁명’ 하면 총과 깃발을 먼저 떠올리지만, 수양동우회는 ‘강의와 책’으로 조선을 바꾸려 했던 지식인들의 조직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식민 권력보다 강했기에 탄압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교육의 자율성이 위협받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기억하며 묻습니다:

“지금 나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


🔚 마무리하며

수양동우회 사건은 단순한 탄압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운 역사입니다.

총칼이 없던 그들은, 오히려 더 위협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질문을 다시 꺼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