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국중앙학원 반일학생운동 (1919)
– 교정(校庭)에서 울려 퍼진 자유의 외침
1919년 3월, 조선 전역을 뒤흔든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거대한 민족적 분출이었다.
이 외침은 단지 거리에서만 울린 것이 아니었다.
학교 교정, 교실, 도서관, 그리고 사립학교의 회의실에서도 조용한 저항의 물결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조선 청년들, 특히 ‘교육’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운 학생들이 있었다.
황국중앙학원(皇國中央學院) 역시 그런 곳이었다.
이 학교에서 일어난 학생 주도의 반일 시위는 짧은 기간 동안 벌어진 작지만 굵직한 사건이었으며,
일제는 이 운동을 “사립학교 내 항일 사상 전염”으로 간주하며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잘 조명되지 않았던 이 사건을 다시 되새기며,
당시의 시대상과 함께 학생운동의 의미를 깊이 있게 되짚어본다.
1. 황국중앙학원은 어떤 학교였나?
황국중앙학원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설립된 사립 중등교육기관으로,
서울 종로구 일대에 위치하며 기독교 계열의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근대식 교육과 민족교육을 병행하던 학교였다.
- 학원 내부에는 도서관, 독서실, 자치회실, 토론회 공간이 있었고
- 학생들은 교과 외에도 시사토론, 민족문제, 국제정세에 대한 학습을 활발히 수행했다.
- 특히 교사 다수가 민족주의 계열 출신으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고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황국중앙학원 학생들은 1919년 3월 1일 이후,
자연스럽게 민족운동에 연대하게 된다.
2. 반일학생운동의 발발: 교정에서 시작된 조용한 폭풍
1919년 3월 5일, 서울 시내에서 학생들 중심의 독립만세 시위가 급격히 확산된다.
이에 자극받은 황국중앙학원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운동을 준비한다.
✔️ 내부 준비 활동
- 독서실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필사해 돌려봄
- 야간 토론회에서 3·1운동 지지 선언
- '학생자치회 비밀 회의'에서 반일 시위 추진 결정
- 학생 대표가 교사들에게 지지를 요청했으며, 일부 교사가 묵인
✔️ 3월 8일 실제 시위
- 전교생 약 100여 명 중 50여 명이 교문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침
- 구호: “조선독립 만세”, “일본 물러가라”, “교육을 식민화하지 마라”
- 시위 중 일부 학생이 일경에 체포됨
- 학교 측은 일제의 압박을 우려하여 시위 진압 시도
이 시위는 외부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종로경찰서와 조선총독부 경찰부 내부 보고서에 명시되어 있다.
3. 일제의 대응: 조직적 탄압과 학교에 대한 통제 강화
황국중앙학원 반일학생운동은 일제에 있어 매우 민감한 사건이었다.
사립학교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난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특히 주목했다.
▪︎ 주요 탄압 조치
- 주동 학생 11명 체포, 그 중 6명은 정학 처분 후 구금
- 교사 2명은 '사상 유해 교육자'로 분류되어 해임
- 학교에 대해 사립학교령 위반 혐의 조사 착수
- 학원 이사회 압박 → 운영진 개편 강요
▪︎ 조선총독부 내부 평가
- 1919년 3월 15일자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온다.
“이와 같은 사립기관 내의 사상 선동은 전체 청소년에 대한 감염 위험이 있으므로 강경한 제재 필요.”
이후 황국중앙학원은 교육 방향을 친일 성향으로 점차 전환,
자치회와 토론회 활동은 전면 금지된다.
4. 이 운동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
황국중앙학원 반일학생운동은 비록 지역적이고 단발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1) 교육기관 내 저항운동의 상징
- 일제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며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
- ‘교과서와 칠판’이 ‘총과 칼’만큼 강력한 저항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줌
🌍 2) 청년지식인의 등장
- 이 사건 이후 황국중앙학원 출신 학생들 중 일부는 신간회,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 등에서 활동
- “교육받은 청년이 세상을 바꾼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으로 퍼짐
💔 3) 잊힌 역사의 단면
-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도 거의 보도되지 않았고,
해방 후에도 다른 유명한 만세운동에 비해 주목받지 못함 - 그러나 이는 일제의 ‘조용한 탄압’, ‘침묵의 지배’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5. 남겨진 기록과 후속조사
황국중앙학원 반일학생운동은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언급되지 않았지만,
2005년 한국근현대교육사학회의 자료 재조사에서 관련 문서와 구술 증언이 일부 복원되었다.
-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정○○ 선생의 구술:
“그날 나는 태극기를 교복 안에 숨기고 나섰다.
일본 순사들이 교문 앞을 지키고 있었지만, 우리는 외쳤다.
조선이 독립할 때까지 우리의 외침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
- 총독부 비밀문서에도 ‘황국중앙학원 학생폭동’이라는 제목으로 간략히 기록되어 있음
6.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
이 사건은 청년 교육의 중요성, 그리고 진정한 민족교육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단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어떤 인간을 키우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된다.
“학교는 단지 공부하는 곳이 아니다.
민족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곳이어야 한다.”
황국중앙학원 학생들의 외침은 그 어느 독립운동 못지않게 뜨거웠고,
우리가 오늘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곧 독립운동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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