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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원산 총파업(1929) — 바다 건너 북방에서 시작된 민중 연대의 불꽃

by skillplanner80 2025. 7. 29.

원산 총파업(1929) — 바다 건너 북방에서 시작된 민중 연대의 불꽃


서두 — 바닷가 공업도시 원산에서 울려 퍼진 민중의 함성

일제강점기 조선은 단지 식민지로서 착취당한 땅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서는 수많은 이름 없는 민중들이 제도와 권력,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런 싸움 가운데에서도 1929년 원산 총파업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한 임금 인상 요구를 넘어선 노동자, 학생, 종교인, 여성까지 아우르는 연대의 항일운동이었다. 지금 우리가 살펴보려는 이 사건은 조선 민중 항쟁사에 있어 실질적이고도 전략적인 '합법적 저항의 정점'이었으며, 전국적 민중 연대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총파업 궐기대회


1. 원산이라는 도시의 시대적 배경

함경남도 원산은 조선 동해안의 중심 도시였다. 일제는 원산을 항만·공업·물류의 요충지로 개발하면서, 여러 산업 기반을 집중시켰다.

  • 조선석유, 조선운수, 조선정미회사 등 일본 자본이 운영하는 대규모 기업들이 몰려 있었고
  • 원산항을 통해 수출입이 활발했으며
  • 원산에는 철도, 전기, 전신 등 당시로선 최신 인프라가 들어섰다.

하지만 도시의 화려함 이면에는 엄청난 불평등과 착취가 있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보다 1/3 이하의 임금을 받고, 하루 12~14시간씩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일제는 조선인을 저임금 노예로 만들었고, 해고는 자유로웠으며 복지란 없었다.


2. 파업의 도화선 — 1929년 1월, 조선운수회사에서

1929년 1월 12일, 조선운수회사의 조선인 노동자 약 200여 명이 집단 퇴근을 선언하며 파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 임금 인상
  • 부당 해고 철회
  • 작업환경 개선
  •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 철폐

이 작은 불씨는 곧 원산 전역으로 번져갔다. 조선운수의 파업 소식은

  • 조선석유
  • 조선정미
  • 원산공업소
    등 각 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고, 이들은 연달아 작업을 중단했다.

3. 파업의 확산 — 학생, 여성, 기독교인까지 모두 동참하다

이 파업이 특별했던 이유는 노동자만의 싸움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 원산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하고 시위에 동참했으며
  • **기독교청년회(YMCA)**는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식사와 숙소를 제공했고
  • 여성 노동자들은 직접 가두 시위를 벌이며 현장을 주도했다.

심지어 교회에서는 노동자 위로예배가 열렸고,
집집마다 쌀, 의약품, 옷가지를 모아 시위대에 전달하는 ‘민중의 자율 연대’가 확산되었다.

이는 단일 지역에서 발생한 가장 폭넓은 계층 연합 항일운동이었다.


4. 일제의 반응 — 진압 작전과 여론 통제

조선총독부는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곧바로 헌병대와 경찰병력을 원산에 투입했다.

  • 시위 주동자 약 50여 명을 체포
  • YMCA 간부 구속
  • 원산 여학교 학생들 징계 및 퇴학
  • 지역 내 신문, 교회, 학교에 대해 ‘반일활동 감시령’ 선포

또한 일본 언론은 이를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이라며 왜곡 보도했고,
경성·평양 등지에서는 ‘공산사상자 주의’라는 명분으로 정치적 탄압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원산 시민들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파업은 무려 7개월간 이어졌으며,
구속자 재판을 위한 탄원운동, 변호인단 구성, 항소 준비까지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5. 파업의 전국적 영향 — 민중 연대운동의 모델이 되다

원산 총파업은 비록 물리적으로는 일제의 무력에 의해 진압됐지만,
그 정신과 영향력은 오히려 전국으로 확산됐다.

  • 경성, 평양, 부산, 대구, 군산, 목포 등 도시에서 비슷한 파업 발생
  •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등 학생운동과의 연대 구조 형성
  • 신간회 등 항일단체들이 조직적 지원에 나섰고, 파업 활동가들을 적극 보호

파업 이후 원산에서 활동한 주요 인사들은
신간회, 조선공산당, 조선노농총동맹 등에 합류해 1930년대 민중항일운동의 핵심 인물로 성장한다.

이로써 원산 총파업은 단지 임금 투쟁이 아니라, 계급·세대·종교를 넘은 항일 민중운동의 상징으로 기록된다.


6. 역사적 평가 — 지금,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는 3.1운동, 윤봉길 의사 의거, 청산리 전투 같은 무장 독립운동은 비교적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비폭력적 민중 연대, 그것도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시작된 항일운동은 잊기 쉽다.

원산 총파업은 민중이 스스로 조직하고, 연대하고, 싸우며 만든 역사의 결정체였다.
학생, 노동자, 여성, 종교인, 언론인까지 다양한 계층이 하나 되어 외친 이 사건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시민사회’의 원형이자 뿌리였다.


7. 맺음말 — 바다의 도시에서 피어난 연대의 불꽃

1929년의 원산은 조용하지 않았다.
그곳은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로,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려는 어머니의 눈물로,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소년의 외침으로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 뜨거운 불꽃은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맞서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