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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교실에 핀 저항의 옷고름― 이화학당 학생들의 ‘한복 입기’ 투쟁

by skillplanner80 2025. 7. 29.

교실에 핀 저항의 옷고름

― 이화학당 학생들의 ‘한복 입기’ 투쟁

여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등교하는 장면


“선생님, 저희는 오늘도 한복입니다”

1938년 늦봄, 서울 정동길.
아침 햇살에 은은하게 빛나는 이화학당 교정.
갓 꽃핀 철쭉 옆을
흰 저고리, 분홍 치마,
곱게 단 한복 차림의 여학생들이
뭉클한 얼굴로 들어섭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에요.
교장실 앞에 일본 순사가 늘 서 있다니까요.”

“그래도 한복은 벗지 않아요.
우리 옷이잖아요!”

선배들의 의연한 말에
신입생들도
꼬옥 저고리 끈을 조입니다.


일제, ‘조선의 옷’을 금하다

1930년대,
일제강점기 정책은 점점 더 노골적이었습니다.

  • 학교에 ‘일본식 교복’ 착용을 의무화
  • 조선의 한복, 장옷, 두루마기, 고무신까지
    “미개하다”, “야만적”이라고 매도
  • 등교길, 교문, 심지어 교실에서
    복장 검열이 이루어짐

이화학당을 비롯한
서울·경성의 많은 여학교에서
학생들은

  • 학교 배지 단 교복
  • 양복스타일 치마, 하얀 셔츠, 일본식 붉은 넥타이
    를 강제로 입어야 했습니다.

“한복을 벗는 건, 내 마음을 벗는 것”

하지만
이화학당 여학생들은
차마
일본식 교복을 입지 못했습니다.

“한복은 우리 엄마, 할머니가
손바느질로 만들어주신 거예요.
내가 벗으면
우리 집안, 조선의 자존심이
모두 꺾이는 기분이에요.”

이런 마음은
모두의 마음이었습니다.

  • ‘일본의 옷을 입고
    조선 노래를 금지당하고
    일어 인사를 배우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다.’

교문 앞, 한복의 물결

1938년 6월,
이화학당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 “내일부턴 모두 한복만 입고 오자”
    결의했습니다.

등교 첫날,
백여 명의 학생이
알록달록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교문을 지나는 순간,
일본인 교장과 순사가
엄하게 지켜봅니다.

“어이, 모두 교복 입으라고 했지 않느냐!”

“오늘은 준비가 안 됐어요.
내일은 더 예쁜 한복 입고 올 거예요.”

학생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교실로 향합니다.


선생님과 교장, 순사의 압박

일본인 교장은
학생들을 차례로 불러

  • “교칙 위반”
  • “민족감정 자극”
    이라며
    징계와 훈계,
    심지어 퇴학 위협까지 했습니다.

순사는

  • “한복 입고 오면
    내일부터 학교 못 들어온다”
    며 윽박질렀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함께 한복을 입었습니다.

“혼나도 괜찮아요.
우리 옷, 우리 마음
빼앗길 수 없으니까요.”


‘한복 연대’로 번진 저항

이화학당 한복 투쟁은

  • 경성여고보,
  • 진명여고,
  • 중앙여고,
  • 심지어
    일부 남학생 학교로까지
    번져 나갔습니다.

길거리, 전차, 시장골목,
모두 한복 차림 학생들이
줄지어 걷는 모습이
경성 시민들의
은밀한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 “저 학생들 봐,
    기특하네!”
  • “우리 딸도 한복 고집해야지.”
  • “자존심은 옷에서도 나온다.”

신문과 사회의 반향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는
‘여학생들의 한복 투쟁’이
은근히
“학생 자율과 미풍양속의 중요성”
“일본식 복장 강요, 지나치다”
는 논조로 실렸습니다.

  • 일부 일본 관리들은
    “민족감정만 부추긴다”
    “본보기로 퇴학시켜야 한다”
    분개했지만

학교의 일부 한국인 교사들은

  • “학생 뜻이 옳다.
    나도 한복 입겠다.”
    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한복 치마폭에, 조선의 자존심을”

한복만 입는 저항은
단순히 복장 투쟁이 아니었습니다.

  • “나는 일본인이 아닙니다.”
  • “내 뿌리를, 내 가족을, 내 조선을
    옷으로 지킵니다.”

학생들끼리는

  • 각자 집안에서 가장 곱고
    단정한 한복을 꺼내 입고
  • 서로의 옷고름을 매주며
    “오늘도 힘내자”고 응원했습니다.

때론

  • 집안 어른들,
    동생들까지
    등굣길에 함께 한복을 입고
    ‘작은 퍼레이드’가 되기도 했습니다.

징계, 협박, 그리고 연대

투쟁이 길어지자
몇몇 학생은

  • 정학,
  • 반성문 제출,
  • 특별감시
    처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화학당 학생들은
‘징계는 두렵지 않다’며

  • 담임선생님께
    “저는 한복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손편지를 올렸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 학교 앞까지
    전통 한복을 들고 와
    딸을 안아주며
    “아무리 힘들어도
    내 딸, 한복만은 벗지 마라”
    용기를 북돋았습니다.

교실 안팎의 작은 변화

한복 입기 투쟁이 이어지자

  • 일부 일본 교사,
    순사들도
    ‘강압’에서
    점차 ‘묵인’으로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는

  • “이화는 역시 자존심!”
  • “우리도 해내면 된다!”
    라는 자부심이 퍼졌습니다.

한복만 입고 등교하는 날,
누군가

  • ‘아리랑’을 작게 흥얼거리면
    모두가
    “아리랑~ 아리랑~”
    소곤소곤
    따라 불렀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집니다.

해방 이후, 한복과 자존심의 기억

광복이 찾아오자

  • 일본식 교복 규정은
    폐지되고
  • 학생들은
    다시 자유롭게
    한복, 양장,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화학당 한복 투쟁에
참여했던 학생들,
그들의 후손들은

  • “한복 치마폭이
    조선의 자존심이었다”
  • “복장투쟁이
    나라 사랑, 독립운동의
    한 조각이었다”
    라고 회고합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옷은
단순히 몸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 정체성,
  • 자존감,
  • 역사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이화학당 학생들이
한복 고름을 꽉 동여맸던 그날,
우리 민족의 자존심도
조용히, 강인하게
지켜졌습니다.

“나는 한복 입은 내 딸이

가장 아름다웠다.

그 치마폭에

조선의 미래가

살아 있었으니까.”

― 한 어머니의 수기 중


참고자료

  • 이화학당 100년사, 학교 연혁집
  • 1930~40년대 신문 기사(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 독립기념관·여성사박물관 구술·자료
  • 한복·복장투쟁 관련 논문, 가족 회고록
  • 근현대 여성사 구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