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북청학생항일운동 (1927) – 함경도의 조용한 불꽃, 학생들이 일으킨 민족의 외침
일제강점기, 수많은 민족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조명이 적었던 곳이 함경도 지역입니다. 특히 **1927년 함경도 북청에서 일어난 ‘북청학생항일운동’**은 중앙 언론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지역 사회와 식민 권력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투쟁의 한 장면으로 기록될 만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북청학생항일운동은 단순히 일부 학생의 일탈적 행동이 아니라, 당시 조선 청년들이 겪은 민족 억압과 교육 불평등, 사상 통제에 맞선 조직적 저항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시대적 배경, 사건의 전개 과정, 주체 세력, 일제의 탄압, 그리고 오늘날 가지는 의미를 체계적으로 살펴봅니다.
1. 시대적 배경: 1920년대 후반,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
1920년대는 일제의 식민 통치가 점점 강경해지던 시기였습니다.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라는 명목으로 겉보기에는 관용적인 정책이 펼쳐졌지만, 실제로는 언론·교육·집회·결사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고, 민족주의자들을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습니다.
특히 함경도 지역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중앙 감시에서 조금 자유로운 듯 보였지만, 일제는 오히려 그 지역의 민족운동을 더 위험하게 보고 탄압의 강도를 높였습니다. 당시 북청 지역 청년들은 민족 계몽과 독립사상을 조용히 퍼뜨리며 저항의 불씨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2. 북청의 청년들, 조직을 만들다
북청에는 당시에 북청공립보통학교, 북청중학교, 사립 야학교 등이 있었고,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던 분위기였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생들은 비밀리에 독서회, 토론회, 자치회를 조직하며 민족의식과 항일의지를 공유했습니다.
1927년,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적 사상과 민족해방운동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인물들로, 조선 공산당 및 사회주의 계열 단체들과 연결되어 조직적 행동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이들이 노렸던 것은 단순한 선언이나 시위가 아니라, **북청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학생주도 항일투쟁'**이었습니다.
3.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시작
운동은 1927년 3월경부터 본격화됩니다. 이들은 교내에서 일본어 교육 반대, 식민사관 교육 반대, 조선어 수업 강화, 자치활동 보장 등을 요구했습니다.
또한:
- 교내 일장기 게양 철거 시도
- 일본인 교사의 폭언 및 체벌에 대한 항의 집회
- ‘조선 독립 만세’ 소리 없는 시위 전개
- 북청장날이나 읍내 장터에서 유인물 배포
등의 활동이 이루어졌습니다.
학생들의 항의는 북청 전역에 알려졌고, 학부모들과 지역 인사들도 일부 동조, 교사들 중 일부도 묵인 또는 암묵적 지지를 보냈습니다. 이는 단순한 '학생 소동'을 넘어선 지역사회의 항일 저항 움직임으로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4. 일제의 탄압과 검거
학생들의 행동은 곧 일제 경찰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었고, 곧바로 함경도 지역 순사대가 북청으로 출동합니다.
- 3월 말, 1차 검거로 10여 명의 학생이 연행
- 4월 초, ‘북청청년회’ 및 야학교 관계자 20여 명도 검거
- 중학교 3학년 학생 일부는 퇴학 조치
- 학부모 대상 경고 및 가택수색
경찰은 이를 ‘공산주의 선동 사건’으로 규정하고, 치안유지법을 적용해 최고 징역 3년형을 구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는 불기소되었고, 몇몇은 감시 대상자로 전환되어 지속적인 사찰을 받게 됩니다.
5. 운동의 여파와 지역 사회의 변화
이 사건은 일제 입장에서는 철저히 은폐해야 할 민감한 지방 항일사건이었기 때문에 언론 보도는 거의 차단되었고, 공식 역사자료에도 기록이 매우 빈약합니다. 하지만 북청 지역 주민들의 구전과 일부 지역 신문, 학생 일기장 등을 통해 그 흔적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북청학생항일운동 이후, 함경도 청년들의 의식화가 가속화되었고, 이후 1930년대 원산 총파업이나 함흥노동자 저항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또한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의 교육 참여도와 민족학교 설립 운동도 활발해졌습니다.
6. 오늘날 이 사건이 갖는 의미
북청학생항일운동은 규모나 조직력 면에서는 대대적인 민중운동은 아니었지만, 학생들이 스스로 조직하고 실행한 항일 실천의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는 이후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학생 중심의 항일운동 흐름, 특히 광주학생운동(1929) 등의 전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역적으로 소외되었던 함경도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전국 곳곳의 민족운동이 ‘서울 중심’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 마무리
‘북청학생항일운동’은 이름은 낯설 수 있지만, 그 속에는 뜨거운 조국애와 민족 해방의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민족의 언어와 자존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지역 사회는 조용히 그들을 응원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기억하고 조명하는 일은, 침묵된 역사를 되살리는 일이며,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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