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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1927년 인천부두 하역노동자 총파업 사건 – 식민지 조선 노동자의 절규가 울려 퍼진 항구

by skillplanner80 2025. 8. 4.

1927년 인천부두 하역노동자 총파업 사건 – 식민지 조선 노동자의 절규가 울려 퍼진 항구

서론 – 항구 도시 인천의 어둠 속에 울려 퍼진 함성

1927년 5월, 조선의 대표적인 항구도시 인천에서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들은 더 이상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지 않았고,
더 이상 일제의 명령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날, 인천부두 하역노동자들이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총파업을 선언한 것이다.

이 파업은 단순한 임금 문제에서 시작됐지만,
결국 식민지 조선 노동자의 권리와 존엄, 그리고 조직적 항일 의식이 결합된
중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했다.

인천부두 하역 노동자 총파업


인천부두와 조선 노동자의 현실

당시 인천항은 일본과 만주를 잇는 핵심 무역항이었다.
1920년대 후반, 일본의 만주 침탈이 가속화되며
인천은 전략적으로 더욱 중요한 항구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 거대한 항구를 움직이던 것은 다름 아닌
조선인 하역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인근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빈농 출신으로,
하루 12시간 이상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며
기초적인 안전장비도 없이 일하고 있었다.

당시의 일당은 평균 50전에 불과했으며,
그마저도 일본인 감독관이나 ‘조선인 하청 관리자’들의
횡포로 공제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식민지 구조에서 조선 노동자들은 최하층 계급이었고,
인권은커녕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파업의 발단 – 단순한 임금 문제에서 시작된 분노

1927년 5월 초,
일본인 회사 측은 하역노동자들의 일당을 10% 삭감한다고 발표했다.
이유는 "국제 경기 침체에 따른 물류 감소"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인천항 물동량은 증가 중이었고,
오히려 일본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유지되거나 인상되고 있었다.

하역노동자들은 즉각 반발했다.
이들은 이미 ‘노동조합’의 전신인 작업반 회의체를 조직하고 있었으며,
이날 처음으로 전체 노동자 총회를 열고 파업을 결의한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배고픈 노동에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

5월 12일, 인천항 제1부두부터 5부두까지의 전 하역노동자 약 1,000명이
작업을 전면 중단했다.


파업의 확산 – 단결과 연대로 이뤄진 거대한 흐름

총파업 소식은 삽시간에 인천 시내에 퍼졌고,
인근의 전차 운전수, 짐꾼, 정미소 노동자 등 유사 직종 노동자들
자발적으로 파업을 지지하며 **'연대 파업'**에 동참했다.

하루 평균 4~5척의 화물선이 작업을 못하게 되자
일본 상선회사는 총독부에 '군 경찰 파견'을 요청했고,
5월 14일부터는 경찰이 부두에 상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매일 부두 앞 공터에 모여
자체 집회를 열고,
“임금 인상”과 “노동 시간 단축”, “감독관의 횡포 중단”을 요구했다.

당시 노동자들이 제작한 격문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실려 있다:

“우리는 조선인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일하고 싶다.”


일제의 탄압 – 파업의 강제 해산

5월 17일,
일제는 인천경찰서 소속 경관 약 200명을 동원해
파업 현장을 ‘불법집회’로 간주하고 강제 해산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 대표 5명이 체포되었고,
주동자 명단에 오른 13명이 구속되었다.
나머지 노동자들은 협박과 회유 속에서 점차 일터로 복귀했지만,
파업은 약 6일 동안 강력하게 유지되었으며,
이 기간 인천항의 물류는 거의 마비
되었다.

일본 측은 이후
조선인 하역노동자 200여 명을 해고하고,
새로운 노동자를 **‘신원 보증제’**로 고용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이는 조선인 노동자의 ‘조직화’를 원천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사건의 의의 – 식민지 노동운동의 전환점

이 사건은 당시에는 단순한 지역 파업으로 기록되었지만,
현재 역사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1. 노동조직의 탄생
    • 기존에 자율적인 반장이었던 노동자들이
      실제 조합 형태로 조직화된 최초의 사례 중 하나.
  2. 계급 + 민족 저항의 결합
    • 단순한 임금 문제가 아닌,
      ‘조선인 노동자’로서의 민족 차별에 대한 본질적인 저항.
  3. 연대의 시작
    • 인천 시내 타 직종 노동자와의 연대가 이뤄지며
      ‘산업별 총파업’이라는 형태를 최초로 시도함.
  4. 일제의 노동탄압 강화 계기
    • 이후 일제는 노동자들에 대한 사전 사찰 및
      정보 수집을 강화하고, ‘불온단체 감시 문건’ 작성을 본격화함.

현재의 기억 – 잊힌 노동자의 역사, 다시 조명되다

오랜 시간 동안 이 사건은
지역 노동사 안에서도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이름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고,
당시 신문 기사도 ‘질서 교란’이라는 표현으로 왜곡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노동운동사 연구자들이 본격적으로 재조명하기 시작했으며,
인천 시민단체와 진보적 역사교육 단체들이
이 사건을 ‘노동자의 날’ 기념행사에서 소개하면서
다시 조명을 받게 되었다.

2017년 인천 근대역사관은
‘항만노동의 역사 특별전’을 통해
1927년 총파업 당시 제작된 격문 복원본과
관련 문서를 전시했다.


결론 – 짐을 내려놓고, 목소리를 든 사람들

하역노동자란 늘 짐을 들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1927년의 그들은 짐 대신 깃발을 들었다.
그 깃발에는 민족, 노동, 인간의 존엄이 담겨 있었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억압 속에서도
그들은 무릎 꿇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날 항구에서 울려 퍼진 함성은
오늘날 우리의 권리 위에 놓인
역사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