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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1936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폐지 반대 운동 — 조선 여학생의 집단적 외침

by skillplanner80 2025. 8. 3.

1936년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폐지 반대 운동 — 조선 여학생의 집단적 외침

서론 — 지워진 학교, 지워지지 않은 목소리

1936년, 평양의 한 교정에서 울려 퍼진 여학생들의 발걸음은
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에 작지만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 울림은 단지 교육권을 지키기 위한 외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여성의 미래를 지키고자 하는 주체적 저항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교육정책에 대한 통렬한 반격
이었다.

당시 일제는 조선 여성의 교육을
최소한의 ‘가사 능력’ 중심으로 축소하려 했고,
전문적이고 고등 수준의 교육기관은
점차 통폐합 혹은 폐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제는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平壤女子高等普通學校)의 폐교 계획을 추진했지만,
예상치 못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 학교의 여학생들이었다.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폐지 반대운동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란 어떤 학교였나?

1910년대 설립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는
조선 여성에게 드물게 고등보통 수준의 정규 교육을 제공한 관립학교였다.
당시 조선에서 여성에게 보통학교(초등학교) 이상의 교육을 제공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었으며, 이 학교는
전국에서 우수한 여학생들이 모여드는 상징적인 교육기관이었다.

학제는 5년제로 운영되었고,
졸업생들은 간호사, 교사, 문필가, 통역사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며
조선 여성의 지적 자립을 상징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학교 교육의 핵심은
기초적인 수학, 과학, 국어, 외국어(일본어), 가사, 체육 등 균형잡힌 교과과정이었으며,
특히 자율적인 학급 운영과 문예 활동이 활발했다.

그러나 1935년 말부터, 조선총독부는
‘비효율적 학교 운영’과 ‘여성 교육의 과도한 지식화’를 이유로
학교 폐지 혹은 일본인 여학교와의 통합 방침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사건의 발단 — 통폐합 발표와 여학생들의 반응

1936년 4월, 조선총독부는
평양여자고보를 평양일본인여자고등학교와 통합하고, 조선인 여학생의 입학 정원을 축소하겠다고 발표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교육예산 삭감이었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조선 여성의 고등교육 기회 축소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들은 충격에 빠졌다.
5학년 학생 중 일부는
“우리의 미래가 지워진다”는 말을 남기며
수업을 거부하고 학내에서 시위를 조직했다.

당시 여학생들이 만든 격문 일부는 다음과 같다:

“공부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황국의 부엌이 아니라,
조선의 머리입니다.”


집단 항의와 학내 시위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교문 앞 농성을 시작했고,
수업시간에는 가부장적 교육에 대한 풍자시를 낭독하며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4월 말에는
일부 학부모들과 졸업생들이 함께 참여한
**‘학교 폐지 반대 서명 운동’**도 벌어졌다.
당시 약 1,200명의 서명이 모였으며,
이들은 총독부 평양지청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학생들은 수업시간 외에도
교내 게시판에 자작시와 항의문을 부착하고,
일부는 '조선어 수업 존치'와 '여성 고등교육 유지'를 촉구하는 손편지를
당시 언론사에 보내기도 했다.


일제의 탄압과 강제 해산 조치

5월 초, 조선총독부는
이 운동을 '불온사상 선동'으로 규정하고

  • 주동 학생 4명을 무기정학
  • 지도교사 2명을 해임
  • 전교생에 대한 가정통신문 검열
  • 여학교 문예활동 전면 금지
    를 단행했다.

결국 학교는 1937년 공식적으로 통폐합되었고,
일본인 여학교 중심으로 흡수되었다.
조선 여학생의 입학 정원은 절반 이하로 줄었으며,
학교 내 조선어 수업도 폐지되었다.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

  1. 조선 여성의 집단적 교육권 투쟁
    • 단순한 학생 시위가 아닌,
      여성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집단적 항의로 기록됨.
  2. 식민지 우민화 정책에 대한 내부 저항
    • 여성 교육 축소는 식민지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이 저항은 그 정치적 맥락을 꿰뚫고 있었다.
  3. 문학·언어를 통한 상징적 저항
    • 시와 자필 격문, 자율적 낭독 활동을 통해
      ‘여성 지식인’으로서의 주체성을 표현함.
  4. 지역 교육 공동체의 연대
    • 졸업생, 학부모, 교사가 함께 움직였다는 점에서
      식민지 시대 교육 연대운동의 보기 드문 사례.

침묵 속의 기억 — 잊힌 역사의 재발견

이 사건은 오랫동안 공식 교육사에서는 다뤄지지 않았다.
폐교 이후 관련 문서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일제는 기록에 “통합교육을 위한 개편”이라는 표현만을 남겼다.

그러나 해방 후 일부 졸업생들의 증언과
2010년대 지역 언론의 탐사 보도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재 평양에 남아 있는 구 교정은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흔적이 희미해졌지만,
이 사건은 여전히 조선 여성의 교육 독립운동으로서
역사적 가치가 평가받고 있다.


결론 — 배움의 권리를 지킨 조선의 여학생들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폐지 반대 운동은
단지 하나의 학교를 지키려는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여성의 정체성과 자율성,
그리고 미래 세대의 학습권을 향한 깊은 외침이었다.

그날, 교정에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여학생들의 용기 덕분에
우리는 지금도 배움의 권리는 저항과 함께 지켜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