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 장날 총격 사건 (1931) — 장터에서 터진 총성, 침묵 속의 항일 비극
1. 서문 — 평범한 장날, 피로 물들다
1931년 봄, 경상북도 청송의 장터는 언제나처럼 분주했다.
주민들은 소를 사고 곡식을 팔고, 바느질거리와 엿을 사고팔며
가난하지만 활기를 띠는 전통적인 시골 장날의 풍경이 펼쳐졌다.
그러나 그날,
일제 헌병의 총성이 장터를 가르며 터졌다.
민중 속에서 항일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로
무고한 주민이 공개 총살되었고,
그 자리는 단숨에 공포의 현장이 되었다.
이 사건은 지역 항일운동의 한 단면이자,
일제 통치하의 조선 민중이 얼마나 쉽게 죽음 앞에 놓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건은 오늘날 거의 알려지지 않은,
침묵 속의 항일사건으로 남아 있다.
2. 시대적 배경 — 1931년, 동요하는 조선
1931년은 일제가 본격적으로 파시즘적 통치를 강화해가던 시기였다.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의 야욕을 본격화했고,
조선 내에서도 불령선인 색출과 고등경찰 제도 강화가 진행되었다.
특히 지방 소도시나 농촌 장터 등은
‘비조직적 선동의 위험 지역’으로 간주되었고,
일제 경찰은 유언비어, 항일노래, 비밀 전단 등을 철저히 단속했다.
청송은 경북 북부의 평범한 산간지역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민족계열 청년운동과 기독교 야학이 은밀하게 퍼지고 있던 곳이었다.
일제는 청송 장날을 사상 단속의 표적으로 삼는다.
3. 사건의 발단 — ‘독립군이 온다’는 말 한마디
1931년 4월 8일, 청송읍 장터.
오전 무렵, 누군가 장터 한가운데에서
“독립군이 내려온다 카더라”,
“이번에 일본 놈들 물러간다”
라는 말들을 퍼뜨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러한 유언비어는 마치 전염병처럼 퍼졌고,
장터에 모인 이들 사이에서 흥분과 기대가 번져나갔다.
그때,
이미 잠복해 있던 일제 헌병대 소속 병사들이
“불온선동 현행범 체포”라는 명분으로
장터 중앙으로 돌진해 총을 꺼내 들었다.
4. 총성 — 공포정치의 상징이 된 장터
체포 과정에서 정체불명의 40대 남성이 붙잡히며
군중이 몰려들어 “무슨 죄냐” “놔주라”는 항의가 나오자,
헌병은 경고 없이
공중을 향해 2발, 군중을 향해 3발의 실탄을 발사한다.
이 과정에서 2명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5명이 중상을 입은 채 쓰러졌으며,
수십 명이 도망가다 발에 맞거나 짓밟혀 부상당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은 8명이었으며,
모두 **‘유언비어 유포 및 불령선인 협조 혐의’**로
청송경찰서로 연행된다.
이 중 3명은 고문 후 일본인 검사의 기소로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1명은 고문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5. 언론의 보도 통제와 지역의 침묵
이 사건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오히려 **《매일신보》**에는
“청송 장터에 불온 언설 선동자 발생. 즉시 체포. 평정 완료.”
라는 단문만 남았다.
그날 장터에 있었던 주민들은
사망자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다시는 입을 열지 말라”는 위협을 받았고,
이후 장날에는 군경 10여 명이 상시 주둔하게 된다.
장터 근처의 야학과 교회도 폐쇄되었고,
**‘청송은 불온한 고장’**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수년간 주민들은 입을 닫고 살아야 했다.
6. 무명의 항거 — 침묵 속의 저항
이 사건의 가해자는 명확하지만,
피해자의 이름조차 역사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지역의 구전과 몇몇 민속사 자료에 따르면
- “그날 맞아 죽은 이는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마을 엿장수였다”
- “진짜 유언비어는 마을 노인들이 구전하던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 “그 말을 옮긴 청년은 사실 글도 모르는 자였고, 그저 꿈을 말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증언은 항일운동이 꼭 조직적으로, 이념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가끔은, 단순한 희망이 저항이 되었고
그 희망조차 총알로 짓밟히던 시대가 있었다.
7. 이후의 영향 — 공포와 망각
청송 장날 총격 사건 이후
- 지역의 야학, 민족계열 교회, 청년운동 조직 전면 해체
- 청년 다수 취업 및 진학 불허
- 이후 장날에는 장정들의 출입 제한 조치 시행
- 1935년까지 청송은 ‘특별 감시구역’으로 지정됨
청송 장날 사건은
조선의 작은 고장에서 벌어진 비극이었지만,
그 여운은 광범위한 침묵과 자기검열로 이어졌다.
8. 마무리 — 장터는 다시 열렸지만, 역사는 닫혔다
청송 장날은 다음 주에도, 그 다음 해에도 계속 열렸다.
닭과 소, 쌀과 엿, 소문과 바람이 오가는 장터는
언제나처럼 반복되었지만,
그날의 총성과 피는 조용히 묻혔다.
이 사건은
기록되지 않은 학살이며,
기억되지 않은 항거였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그 장터에 울린 총성의 의미를 다시 꺼내어 말해야 한다.
항일은 기록된 영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항일은 침묵당한 민중의 눈물 속에도 있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육사 체포 사건 (1937) — 시인이자 투사, 조선의 미래를 품은 폭탄 (2) | 2025.08.02 |
---|---|
간도참변 (1920) — 피로 쓴 국경의 기억, 잊혀진 대학살 (2) | 2025.08.01 |
문맹퇴치운동 탄압 사건 —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 금지된 자유의 이름 (1) | 2025.08.01 |
광주학생항일운동 (1929) — 조용한 교복 아래 숨겨졌던 저항의 불꽃 (4) | 2025.07.31 |
보천보 전투 (1937) — 압제의 심장을 향한 불꽃, 그날의 총성이 남긴 것 (2) | 2025.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