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항일운동 (1929) — 조용한 교복 아래 숨겨졌던 저항의 불꽃
1. 3.1운동 이후, 또 하나의 민중 항쟁
1929년 11월 3일, 전라남도 광주의 한 거리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일제에 맞서 거리로 뛰쳐나왔다.
“조선 독립 만세!”라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은 조선어 사용, 민족교육, 식민지 차별 철폐를 외쳤다.
이 운동은 단지 일시적인 학교 내 소요가 아니었다.
단기간에 전국 300여 개 학교, 약 5만 명 이상의 학생이 참여한
3.1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학생운동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잘 모른다.
지역 사건이라는 이유로, 정치적 맥락이 복잡하다는 이유로
이 운동은 근현대사 교육의 한켠에만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분명히 기억되어야 한다.
그것은 학생들이 주도한 민족의 각성 운동이자
조선의 미래를 준비했던 세대의 함성이기 때문이다.
2. 발단 —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의 차별 사건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일본인중학교 학생 간의 충돌이었다.
1929년 10월, 나주역 기차 안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고 폭행한 사건이 발생한다.
조선인 남학생들이 이를 제지하자, 일본인 학생들과의 집단 싸움으로 번졌다.
일제 경찰은 이 사건을 **조선인 학생들의 ‘폭동’**으로 몰아가고
피해자인 조선 학생들을 연행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이건 단순한 싸움이 아니다”라는 인식이 확산된다.
학교 측은 오히려 일본인 편에 섰고,
경찰은 조선 학생들에게만 불이익을 주며
학생들은 교육 현장에서조차 보호받지 못한다는 현실에 분노한다.
그 분노는 광주 전역으로 번졌고,
11월 3일을 기점으로 전면적인 항일 시위로 확대되었다.
3. 시위의 확산 — 전국을 흔든 교복 저항
광주에서 시작된 시위는
곧 목포, 나주, 군산, 전주, 대구, 부산, 서울 등
전국 주요 도시로 퍼졌다.
- 조선어 교육 요구
- 일장기 게양 반대
- 민족차별 철폐
- 일본 교사 퇴출
- 보통학교 교육 정상화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왔으며,
‘독립 만세’, ‘식민교육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운동은 약 5개월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체포된 학생만 약 1000명,
징계, 퇴학 조치는 수천 건에 달했다.
특히 여학생들의 참여가 활발했고,
이 운동을 계기로 여성 독립운동 참여가 제도권 밖에서 활발히 시작된다.
4. 신간회의 역할 — 조직과 확산을 이끈 민족 단체
신간회는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현장 조사단 파견
- 전국 언론에 사건 보도
- 탄원서 작성 및 체포자 법률 지원
- 시위 확산에 필요한 조직적 정보 제공
이로 인해 광주학생항일운동은
단순한 학교 사건을 넘어,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전환될 수 있었다.
또한 신간회의 개입은
“합법적 민족운동 단체가 불법 운동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일제의 신간회 해소 압박이 더욱 거세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5. 일제의 반응 — 무자비한 진압과 보도 통제
일제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절대로 ‘학생 자율운동’으로 보지 않았다.
- 조선공산당 배후설 제기
- 교사 연행, 야학 단속 강화
- 운동에 참여한 여성 학생들까지 고문
- 언론에 ‘폭도 학생’, ‘혼란 조장자’ 프레임
특히 일제는 이 운동이 ‘계급의식과 민족주의가 결합된 운동’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학생들이 사회 불만층과 연대할 경우
전국적 항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경찰과 헌병은 각 지역 학교에 사복 형사를 상주시키고, 학생들의 모임을 감시했으며
수많은 청년들이 이후 ‘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장기간 취업, 진학, 병역 등에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6. 광주의 의미 — ‘지방’이었던 광주가 역사로 남은 이유
왜 이 운동은 광주에서 시작됐는가?
그 배경에는
- 기독교 계열 학교의 민족의식 교육
- 신간회와 YMCA 등 진보 단체의 인프라
- 지역 내 일본인과의 사회적 긴장
- 학생들 간의 뚜렷한 민족 정체성 교육
등이 있었다.
광주는 이미 3.1운동 이후 민족운동의 또 다른 심장이 되어 있었고,
1930년대 초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다시 일어나기 전
청년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불태운 무대가 된 것이다.
7. 마무리 — 그들은 아직 교복을 입고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한 청년들의 선언이며
- 민족교육을 갈망한 학생들의 투쟁이며
-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은 지식인의 씨앗 운동이었다.
우리는 오늘도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을 보며 말한다.
“미래의 주역”이라고.
하지만 이 미래는 누군가의 용기와 희생이 만든 결과다.
그들이 입었던 교복은 단순한 제복이 아니라,
독립을 향한 언어 없는 깃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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