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천보 전투 (1937) — 압제의 심장을 향한 불꽃, 그날의 총성이 남긴 것
1. 서론 — 철저히 감춰진 항일의 총성
1937년 6월 4일, 함경북도 보천보(普天堡). 어두운 밤하늘을 찢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 총성은 단지 작은 국경 마을에서 벌어진 무장 충돌이 아니었다.
조선인의 의지를 꺾으려 했던 일제의 통치 심장에 날린 일격이었고, 동시에 침묵하던 조선 민중에게 울리는 각성의 외침이었다.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이 이끈 항일 유격대가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해 일으킨 조선 내 유일의 직접 무장 공격 성공 사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 일제에 의해 철저히 보도 통제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정치적 해석이 얽히며 일부러 잊혀진 역사가 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천보 전투를 돌아보는 이유는 단순히 특정 인물이나 세력의 업적을 논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날, 억압의 현실에 맞서 삶의 위험을 무릅쓰고 총을 들었던 수많은 청년들의 용기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2. 시대적 배경 — 무장 항쟁이 선택받은 이유
1930년대 중반, 조선 반도는 철저한 통제와 검열의 시기였다.
3.1운동 이후 강경 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선회했던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계기로 다시 강력한 군사·사상 통제로 전환하였다.
치안유지법과 고등경찰제도가 강화되었고,
신간회 해산(1931), 조선어학회 사건(1942) 등 조직적 저항은 대부분 뿌리 뽑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국내에서의 합법적인 항일운동은 거의 불가능해졌고,
점점 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연해주 등 국외에서 무장 항쟁을 조직하게 된다.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만주에서 활동하던 유격대 중 하나였으며,
이들은 단지 일제를 물리치는 것을 넘어 조선 민중에게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려 했다.
그 상징적 작전이 바로 보천보 습격이었다.
3. 보천보 전투의 전개 — 전광석화처럼, 조선 땅을 밟다
1937년 6월 3일 밤,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유격대는
국경을 넘어 조선 땅 보천보로 침투했다.
이들은 대략 100명 내외였고, 민가로부터 우회하여 산등성이를 따라 이동한 뒤
다음 날인 6월 4일 이른 새벽, 보천보 경찰서와 면사무소를 동시에 기습했다.
- 일본 경찰 약 10여 명은 반격도 못 한 채 제압
- 면사무소에 불을 지르고 일장기를 찢으며 항일 의지를 과시
- 보천보 주민들에게 독립과 해방을 외치는 연설을 진행
- 농회, 소방대, 우편소, 금융조합 등 일제 기관을 파괴
당시 보천보 주민들은 유격대를 향해 쌀과 물, 의복 등을 제공하며 은밀히 지지했다.
전투는 약 2시간 내외로 마무리되었으며, 유격대는 피해 없이 국경 너머로 철수했다.
이 전투는 조선 땅에서 일어난 항일 무장투쟁 중 유일하게 성공적인 대중 선전과 군사적 결과를 함께 달성한 사건으로 남는다.
4. 일제의 반응 — 철저한 보도 통제와 역추적
보천보 전투 이후, 일제는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첫 번째로는 언론 통제였다.
- 조선 내 신문에는 ‘산적 침입’ ‘폭도 소탕’이라는 표현으로 보천보 사건을 왜곡 보도
- 경찰 기관의 피해나 주민 반응 등은 모두 삭제
- 일본 본토 신문에도 보도금지령이 내려짐
두 번째는 보복 및 색출 작업이었다.
- 보천보 주변 마을을 대상으로 무차별 가택 수색
- 유격대와 연계된 혐의만으로 수십 명 체포 및 고문
- 북한 지역 내 민간인 학살 보고도 있음
- 국경 감시와 조선인 출입 통제가 대폭 강화됨
이 사건은 단순히 경찰서를 습격한 작전이 아니라,
조선 내에서 일제가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상징적 선언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의 사기 진작을 우려해 보천보 전투를 아예 역사의 무대에서 지우려 했다.
5. 해방 이후의 왜곡 — 누구의 전투였는가?
해방 이후 보천보 전투는 정치적 해석이 얽히며 국내에서는 오랫동안 논의조차 꺼려진 주제가 되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전투의 지도자가 김일성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보천보 전투를
- 김일성의 유일무이한 항일전공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뿌리
- 김일성 개인의 영웅적 전설
로 과도하게 신격화시켰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 전투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북한 체제 선전의 일부로 간주하면서 역사 교육과 언론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하지만 보천보 전투는 단지 특정 인물의 전공이 아니다.
그날 총을 들었던 수많은 조선 청년들,
그리고 침묵 속에서 물을 건넸던 마을 주민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당시 조선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세상에 보여준 역사적 증거다.
6. 보천보의 의미 —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보천보 전투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 항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 조선 영토 내 직접 무장 습격 사례로 드물게 성공
- 민중과 무장 세력이 협력한 사례
- 일제에 대한 군사적 경각심을 일으킨 사건
- 이후 만주지역 유격대 활동의 사기 진작 계기
- 해방 전까지 조선 내 무장투쟁이 가능하다는 상징
보천보는 단지 싸운 장소가 아니라,
모든 것이 억압되던 조선 땅에 '반격'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음을 보여준 곳이다.
7. 맺음말 — 기억과 책임의 경계에서
오늘날 우리는 보천보 전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그저 ‘북한 이야기’로 외면하고 잊어야 할까?
아니다. 이 전투는
- 항일 독립운동의 일부였으며
- 조선 민중이 함께 한 전투였고
- 자유를 향한 누군가의 절박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그날의 총성과 불길을 기억한다면,
그건 단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어떤 역사 인식을 가질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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