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성방직 여성노동자 파업 (1923) — “우리도 사람이다”
조선 최초의 여성 중심 노동운동, 그 잊힌 외침의 기록
📍1920년대 조선, 여성과 노동의 이중 착취 구조
1923년, 경성의 한 방직공장에서 여성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녀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은 가혹한 식민지 지배 아래 놓여 있었고,
그 속에서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사회적 약자 중 약자로 살아갔다.
남성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저임금, 장시간 노동, 잦은 폭언과 폭행,
그리고 감시 아래 놓인 폐쇄적 노동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경성방직은 조선 최대의 방직공장이었고,
이곳에만도 수백 명의 여성들이 노동자로 고용되어 있었다.
이들이 일으킨 파업은 단순한 임금 인상을 넘어
식민지 조선 여성의 각성과 저항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경성방직이란?
경성방직 주식회사는 1917년 설립된 일본계 자본 방직기업으로,
현재의 서울 종로구 일대에 공장을 두고 있었다.
이곳은 일본 본토에서 기술자들을 파견받고,
조선 여성들을 값싼 노동력으로 고용하여
면직물과 원단을 대량 생산하던 곳이었다.
이 회사는 조선 내 방직 산업의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여성노동 착취의 상징이기도 했다.
- 하루 12~14시간에 이르는 고된 작업
- 기숙사에 감금되다시피 생활
- 임금은 한 달 6~10원 수준으로 남성의 절반 이하
- 기계 사고, 이물질 질식, 생리휴가 없음, 성적 학대까지
여성노동자들의 삶은 문자 그대로 **‘침묵의 감옥’**이었다.
🔥 1923년 파업의 시작 — 침묵을 깬 외침
1923년 봄, 공장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쓰러진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공장 내부 온도가 35도 이상, 환기 부족,
일일 13시간 노동 후 2시간 잔업,
이에 따른 탈진이었지만 관리자들은 사적 의료 조치를 금지했다.
이에 분노한 몇몇 여성 노동자들이 기숙사와 작업장을 돌며 조직적인 대화와 준비를 시작했다.
이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밤마다 작은 모임, 종이쪽지 전달, 교대 시간 은밀한 논의를 거듭하며 파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3년 6월, 여성 노동자 200여 명이
한꺼번에 기계 가동을 멈추고 공장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임금 인상하라!”
“잔업을 금지하라!”
“성희롱을 중단하라!”
“기숙사 생활의 자유를 보장하라!”
✊ 파업의 전개 — 스스로 일어선 여성들
이번 파업의 가장 놀라운 점은,
남성 지도자나 사회주의 단체 없이 전적으로 여성들 스스로 주도했다는 것이다.
파업에 참여한 여성들은 자신들이 직접 요구서를 작성했고,
순번을 정해 경찰의 체포를 대비했으며,
비폭력 원칙을 고수하며 끝까지 항의 의사를 표명했다.
파업은 지역 언론과 주변 학교, 종교단체까지 주목을 받게 되었고,
**‘여공들의 의로운 싸움’**이라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일제 경찰과 공장 측은 가혹하게 반응했다.
- 주동 여성 37명 체포
- 기숙사 전면 폐쇄
- 파업 참가자 전원 해고
- 다른 공장에의 취업 금지 조치
경성방직의 파업은 단 6일 만에 강제 해산되었지만,
그 여운은 이후 조선 사회 전반에 강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 파업 이후 — 여성노동운동의 불씨가 되다
이 사건은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여성 주도 파업이자,
여성 인권을 주장한 노동운동으로 평가된다.
이후 조선의 주요 도시에서는
방직공장, 제분소, 화학공장 등에서
여성 중심의 소규모 파업이 이어졌고,
이 사건에 참여했던 일부 여성은
- 형평사 여성지부
- 조선여성동우회
- 신간회 여성국
등에 참여하여 사회운동가로 성장하게 된다.
경성방직 파업은 ‘조용한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 여성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역사적 의의 — 왜 우리는 이 사건을 기억해야 하는가?
우리는 3.1운동, 청산리 전투, 원산 총파업 같은
역동적이고 전국적인 항일운동은 잘 기억하지만,
작은 여성들의 조용한 저항은 잘 알지 못한다.
경성방직 여성노동자 파업은,
단지 임금 몇 원을 올리려는 싸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의 사회적 약자,
그 중에서도 가장 소외되었던 ‘여성 노동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사람답게 살 권리’를 외친 첫 역사적 기록이었다.
이들의 희생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근로기준법, 여성의 노동권, 육아휴직 제도 같은 제도의
출발점이자 씨앗이었다.
📝 마무리 — 이름 없는 그녀들의 용기
1923년의 한여름, 경성의 공장 앞에서
한 젊은 여성이 외쳤다.
“나는 기계가 아니다. 나는 사람이다.”
그 외침은 경찰의 곤봉에,
관리자의 해고 통보에,
침묵을 강요받는 기숙사 안에서 묻혔지만,
그 정신은 우리 마음 속에서 꺼지지 않고 살아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녀들의 목소리를,
그녀들의 이름을,
그녀들의 싸움을
기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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