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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평북 정주 노동야학 검거 사건 (1933) — 일제의 탄압과 민중의 저항

by skillplanner80 2025. 8. 12.

평북 정주 노동야학 검거 사건 (1933) — 일제의 탄압과 민중의 저항

1. 사건 개요

1933년 평안북도 정주에서는 조선의 노동자와 청년들이 주체적으로 운영하던 노동야학이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폐쇄되고 관련 인물들이 대거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단순한 ‘불법 집회’ 문제로 치부되었지만, 그 본질은 조선 민중의 교육권과 민족의식 고취를 억압하려는 일제의 정책이었다.

정주 노동야학은 글을 배우지 못한 노동자, 농민, 빈민층 청년들이 스스로 조직하여 운영하던 야간 교육기관이었다. 일본은 이를 ‘사회주의 사상 전파의 온상’으로 규정하고 집중 감시했다. 마침내 1933년 3월, 일본 경찰은 학습 중이던 교사와 학생 20여 명을 강제 연행하며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를 적용했다.

평북 정주 노동야학 검거 사건 (1933) — 일제의 탄압과 민중의 저항


2. 정주 노동야학의 설립 배경

정주 지역은 당시 평북의 교통·상업 중심지로, 많은 노동자와 하역 인부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체제 아래 조선인의 교육 기회는 극도로 제한되었고, 특히 노동계층은 초등 교육조차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청년 지식인들과 노동운동가들이 뜻을 모아 야간에 글과 산술, 그리고 시대 인식을 가르치는 ‘노동야학’을 만들었다. 이곳에서는 단순 문해 교육뿐 아니라, 위생·노동권·역사 등 실질적 생활 지식과 민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3. 일본의 탄압 이유

일제는 겉으로는 ‘불법 교육기관’ ‘무허가 모임’이라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교육 내용에 담긴 민족의식과 권리의식 고취를 두려워했다.
당시 노동야학에서는 다음과 같은 교육이 이뤄졌다.

  1. 조선의 역사와 문화 소개
  2. 노동자의 권리와 임금 협상 방법
  3.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정책 비판
  4. 사회개혁과 독립의 필요성 강조

이런 교육 내용은 일본의 입장에서 ‘불온 사상’이었다. 특히 1930년대 들어 세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조선 내 노동자 불만이 커지자, 일제는 사상 검열과 정치 탄압을 강화했다.


4. 1933년 검거 과정

1933년 3월 어느 날 저녁, 평북 정주의 노동야학 수업이 한창일 때 일본 경찰은 돌연 들이닥쳤다. 수업 중이던 학생들은 순식간에 포위되었고, 교사와 주요 운영진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압수된 교재에는 역사·정치·노동법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었고, 이는 ‘반제국주의 활동’의 증거로 사용됐다.

체포된 인원은 혹독한 취조를 받았으며, 일부는 장기간 옥고를 치렀다. 이 사건으로 정주 노동야학은 강제 폐쇄됐고, 관련 인물들은 향후 10년간 경찰의 감시 명단에 올랐다.


5. 지역사회 반응

정주 노동야학은 단순한 교육 기관이 아니었다. 그곳은 가난한 노동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배우고 꿈을 키우는 희망의 공간이었다. 폐쇄 소식에 지역 주민들은 분노했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보복을 두려워해 공개적인 저항은 쉽지 않았다.

다만, 일부 청년들은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비밀리에 교육 활동을 이어갔고, 이는 훗날 해방 전후 민중교육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6. 사건의 의의

정주 노동야학 검거 사건은 다음과 같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 교육권 투쟁의 상징 : 식민지 시대 조선인의 교육권이 어떻게 억압되었는지 보여주는 사례.
  • 노동운동과 교육운동의 결합 : 단순한 노동조합 활동을 넘어, 지식과 권리 의식을 확산시킨 운동.
  • 지속적인 저항의 기반 : 폐쇄 이후에도 비밀 교육망이 이어지며 해방 운동의 인적 기반이 됨.

7. 오늘날의 시사점

이 사건은 교육이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사회 변화를 이끄는 힘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권력은 언제나 깨어 있는 시민의식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게 배울 수 있지만, 배움의 목적과 방향은 여전히 중요하다. 과거 정주 노동야학의 정신을 기억하는 것은, 현재의 교육이 누구를 위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8. 결론

1933년 평북 정주 노동야학 검거 사건은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이 스스로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던 투쟁의 역사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해체되었지만, 그 정신은 해방 이후에도 살아남아 한국 사회의 민주·노동·교육 운동 속에 깊이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