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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강원도 원주 농민단체 탄압 사건 (1932)— 식민지 농촌의 분노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by skillplanner80 2025. 8. 12.

강원도 원주 농민단체 탄압 사건 (1932)

— 식민지 농촌의 분노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1. 서론 – 잊혀진 강원도 원주의 함성

1932년, 강원도 원주는 평화롭지 않았다.
겉으로는 조용한 농촌 마을이었지만, 땅을 일구는 농민들의 가슴속에는 억눌린 분노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토지는 대부분 일본인 지주나 친일 지주의 소유였고, 소작농들은 수확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바쳐야 했다.
게다가 일제 당국은 각종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며 농민들의 삶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원주 농민들은 단결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들의 연대와 목소리는, 무자비한 일제의 탄압 앞에서 잔혹하게 짓밟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강원도 원주 농민단체 탄압 사건이다.

강원도 원주 농민단체 탄압 사건 (1932)


2. 사건의 역사적 배경

2-1. 식민지 조선 농촌의 현실

1930년대 초 조선 농촌은 극심한 경제 불황과 일제의 수탈로 고통받고 있었다.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농산물 가격은 폭락했지만, 소작료와 세금은 줄지 않았다.
농민들은 매년 가난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었고, 빚을 갚지 못해 토지를 빼앗기는 일이 속출했다.

2-2. 원주의 지리와 경제

원주는 강원도 남부의 농업 중심지로, 특히 쌀과 잡곡 생산이 많았다.
하지만 평야지대 상당수는 일본인 지주 소유였고, 현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일하며 수확의 50~60%를 지주에게 바쳤다.
여기에 일제의 각종 부가세, 수리조합비, 부역 동원까지 겹쳐, 농민들의 삶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2-3. 농민단체 결성의 흐름

1920년대 후반부터 전국 각지에서는 농민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농민조합 결성이 활발했다.
원주에서도 1931년 말부터 청년 농민들과 진보 지식인들이 비밀리에 모임을 시작했고,
1932년 봄 ‘원주농민단체’라는 이름의 조직이 모습을 드러냈다.


3. 농민들의 요구와 투쟁 준비

3-1. 핵심 요구

원주 농민단체가 내세운 요구는 단순하지만 절박했다.

  1. 소작료 3할제로 인하 – 수확량의 30% 이상은 내지 않겠다.
  2. 부당 세금 철폐 – 수리조합비, 각종 잡세 폐지.
  3. 강제 부역 금지 – 농번기 부역 동원 중단.
  4. 일본인 지주 차별 대우 중단 – 조선인 농민에 대한 폭력과 모욕 금지.

3-2. 조직의 성장

초기에는 20~30명 규모였던 모임이, 몇 달 만에 200명 이상으로 확대됐다.
각 마을별 대표를 선출하고, 비밀 회합을 통해 요구안을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은 항의 서한과 피켓, 구호를 직접 준비했다.


4. 사건의 전개

4-1. 1932년 6월 – 결성식과 첫 집회

원주 장터 근처에서 열린 비공식 결성식에는 300여 명의 농민이 모였다.
그들은 “소작료 인하” “세금 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 행진을 시도했다.
일본 경찰은 이를 불법 집회로 규정하고 해산을 명령했지만, 농민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4-2. 경찰의 개입

원주 경찰서는 곧장 무장 경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했고,
단체 간부 10여 명을 현장에서 체포했다.
체포 과정에서 폭행과 발길질이 난무했고, 부상자가 속출했다.

4-3. 지도부 검거와 조직 붕괴

체포된 지도부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후 경찰은 각 마을을 수색하며 단체 회원 명단을 확보했고, 30여 명이 추가로 구속됐다.
농민단체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남은 회원들은 잠적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다.


5. 일제의 탄압 방식

  1. 법률 탄압 – 치안유지법과 집회·결사법을 적용해 지도부를 장기 수감.
  2. 경제 보복 – 단체 가담 농민의 소작권 박탈, 빚 독촉 강화.
  3. 사회적 압박 – 친일 인사와 마을 유지들이 가담 농민을 ‘불온분자’로 낙인찍어 왕따시킴.

6. 사건의 영향과 여파

6-1. 지역 농민운동의 위축

사건 이후 원주 일대에서는 공개적인 농민운동이 급격히 줄었다.
농민들은 보복이 두려워 공개 집회를 피했고, 대신 소규모 비밀 모임이 이어졌다.

6-2. 전국 농민운동과의 연결

비록 조직은 해체됐지만, 일부 지도부는 출옥 후 다른 지역 농민운동에 참여해 경험을 전했다.
이는 후일 1930년대 후반 강원도 농민운동 재점화의 밑거름이 됐다.


7. 현대적 의의

원주 농민단체 탄압 사건은 단순한 지역 분쟁이 아니라,
식민지 농민운동이 어떤 방식으로 억압당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오늘날에도 농민들은 여전히 가격 폭락, 농산물 수입 개방, 농지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다.
그런 점에서 1932년 원주 농민들의 외침은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농민 권리 투쟁’의 뿌리라 할 수 있다.


8. 결론

‘강원도 원주 농민단체 탄압 사건’은 잊혀진 역사지만,
그 안에는 조선 농민들의 절박한 삶과 불굴의 저항 정신이 담겨 있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결코 과도하지 않았다.
그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었다.
그러나 식민지 권력은 그것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다시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통해 오늘의 농민 문제를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