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대동군 부두노동자 파업 사건 (1931)
— 항만의 분노, 억압을 깨운 노동자의 물결
1. 서론 – 잊혀진 부두의 함성
1931년, 평안남도 대동군의 항만은 전쟁터와도 같았다.
일제의 수탈 경제 아래에서 부두노동자들은 하루 종일 쌀 포대와 석탄 자루를 나르며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턱없이 낮은 임금과 차별이었다.
이 불합리와 억압 속에서, 그들이 마침내 삭발 같은 결단을 내린 날이 있었다.
부두노동자 전면 파업, 그것이 바로 ‘대동군 부두노동자 파업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임금 투쟁을 넘어, 식민지 조선의 노동운동이 어떻게 일본 제국주의 경제 체제와 맞섰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었다.
2. 사건의 배경 – 식민지 경제와 항만 노동
2-1. 평안남도 대동군의 항만 역할
대동군은 평양과 가까운 지점에 위치해, 대동강을 통한 내륙 수송과 해상 무역의 중간 거점이었다.
이곳 부두는 곡물, 석탄, 철광석, 목재 등 식민지 조선의 주요 자원이 일본과 만주로 실려 나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2-2. 일본 기업의 독점
항만 운영권과 하역 작업은 대부분 일본 상사와 운송회사가 독점했다.
이들은 조선인 노동자를 값싼 인력으로 고용해 하루 12시간 이상 강도 높은 노동을 시키고도,
일본인 노동자보다 절반 이하의 임금을 지급했다.
2-3. 노동 환경의 실태
- 임금: 하루 80전
1원 수준 (일본인 노동자의 4050%) - 작업환경: 안전장비 전무, 무거운 짐을 어깨로 직접 운반
- 계약형태: 일용직 형태, 사고 시 보상 없음
- 차별대우: 휴식 시간과 식사 질에서 일본인과 명백한 격차
이런 현실 속에서 부두노동자들은 불만을 쌓아갔고, 결국 1931년 초부터 은밀히 파업 논의를 시작했다.
3. 파업의 도화선
1931년 5월, 일본인 감독관이 조선인 노동자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한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 노동자는 부상을 입었지만 치료비조차 지급받지 못했다.
이 사건은 이미 쌓여있던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 일본 측이 임금 10% 삭감을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노동자 대표들은 항의 서한을 제출했으나 묵살당했고, 이때부터 전면 파업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4. 파업의 전개
4-1. 파업 개시
1931년 6월 12일 새벽, 대동군 부두노동자 약 300명이 일제히 작업을 거부했다.
그들은 부두 입구를 봉쇄하고, 다른 조선인 노동자들에게도 동참을 호소했다.
구호는 단순하지만 강렬했다.
“임금 인상하라!”
“차별 철폐하라!”
“안전한 작업 환경 보장하라!”
4-2. 연대 확산
이 파업 소식은 순식간에 인근 부두와 평양 시내 노동자들 사이로 번졌다.
- 평양역 화물 노동자
- 대동강 인근 운송업 종사자
- 석탄 운반선 선원
이들이 연대 집회를 열어 파업을 지지했다.
일본 경찰은 ‘불온 집회’라며 이를 강제 해산했지만, 연대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5. 일본 당국의 대응
5-1. 강경 진압
일본 경찰과 헌병대는 부두에 병력을 배치하고, 파업 주동자 20여 명을 체포했다.
이들은 ‘치안유지법’과 ‘집회·결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5-2. 대체 인력 투입
당국은 파업을 무력화하기 위해 만주 출신 노동자와 일본인 일용직을 긴급 투입했다.
그러나 부두 시설에 익숙하지 않은 대체 인력은 작업 효율이 떨어졌고, 하역 일정에 큰 차질이 발생했다.
5-3. 협상 시도와 실패
일본 측은 일시적으로 임금 인상안을 제시했지만, 차별 철폐나 안전 장비 지급 요구는 거부했다.
노동자들은 ‘임시 봉합은 거부’라며 협상을 결렬시켰다.
6. 파업의 결과
6-1. 부분적 성과
약 3주간의 파업 끝에, 일본 측은 임금 15% 인상과 휴식 시간 확대를 수용했다.
그러나 일본인과 조선인 노동자 간 임금 격차 해소, 안전 장비 지급, 고용 안정성 보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6-2. 보복과 탄압
파업 후, 주동자 상당수가 해고되었고 일부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다른 항만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이들은 다른 지역 노동운동 조직에 합류해 투쟁을 이어갔다.
7. 역사적 의의
- 항만 노동자의 조직화 사례
부두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을 결성하고 대규모 파업을 이끈 드문 사례였다. - 도시·농촌 노동자 연대의 기반
평양, 대동강 일대의 다양한 직종 노동자가 연대했다. - 식민지 노동운동의 성장 과정
1930년대 초 조선 전역에서 노동운동이 확산되는 흐름 속에서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8. 현대적 시사점
이 사건은 단순한 임금 투쟁을 넘어, 노동 환경 개선과 차별 철폐라는 보편적 가치를 위한 싸움이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노동 문제—비정규직, 안전 미비, 임금 격차—를 생각하면,
1931년 부두노동자들의 외침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9. 결론
‘평안남도 대동군 부두노동자 파업 사건’은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스스로 권리를 찾기 위해 연대하고 싸웠는지를 보여준다.
그 함성은 대동강 바람을 타고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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