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 경북 포항 어민조합 항일 결의 사건 (1936) — 바다 위에서 울려 퍼진 민족의 함성

by skillplanner80 2025. 8. 13.

📜 경북 포항 어민조합 항일 결의 사건 (1936) — 바다 위에서 울려 퍼진 민족의 함성


1. 서론 — 바다를 잃은 어민들의 현실

1930년대의 경북 포항은 지금과 달리 조선 최대의 수산업 중심지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 풍요로운 바다는 조선인 어민들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동해안 어장 대부분이 일본 어업회사 소유였고, 조선인 어민들은 바다를 바라보며도 자유롭게 고기를 잡지 못하는 처지였습니다.

당시 포항 어민들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됐습니다. 일제의 허가를 받은 일본 회사의 배를 빌려 바다로 나가야 했고, 잡아온 고기는 무조건 일본인 상인에게 헐값에 넘겨야 했습니다. ‘내 바다에서 잡은 고기를 내 마음대로 팔 수 없다’는 부당함은 어민들의 가슴 속에 쌓이고 쌓여 결국 폭발하게 됩니다.
그 분노가 조직적 행동으로 터져 나온 사건이 바로 **경북 포항 어민조합 항일 결의 사건(1936)**이었습니다.

경북 포항 어민조합 항일 결의 사건 (1936)


2. 시대적 배경 — 일제의 어업 독점과 착취 구조

2-1. 어장 독점권

조선총독부는 어업법을 제정해 일본인 기업들에게 동해안·서해안 주요 어장의 사용권을 독점적으로 부여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인 어민들은 전통적으로 이용하던 어장을 빼앗기고, 일본 회사가 지정한 구역에서만 어로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2-2. 가격 담합과 헐값 매입

어획물 가격은 일본 어업회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예를 들어, 전년도에 1관(약 3.75kg)에 1원 50전이던 고등어 매입가를 1원 이하로 떨어뜨리는 식입니다.
어민들은 채산성이 맞지 않아도 울며 겨자 먹기로 거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3. 부채와 예속 구조

그물, 어선, 연료까지 일본 회사에서 비싼 값에 대여받아야 했고, 빚을 갚기 위해 계속 그 회사에 고기를 공급해야 하는 반(半)노예적 구조가 형성됐습니다.


3. 어민조합의 결성

포항 어민들은 1930년대 초반부터 비밀 상조회를 결성해 불만을 공유했습니다.
이 모임은 점차 ‘어민조합’이라는 조직으로 발전했으며, 표면적으로는 상호 부조 모임이었지만 실제로는 일본 어업회사의 횡포에 대응하기 위한 항일 조직이었습니다.

1936년 초, 일본 회사가 어획물 매입가를 전년도 대비 30%나 인하하겠다고 발표하자, 어민조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때 결의된 4대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어획물 가격 인하 철회
  2. 어장 독점권 폐지
  3. 장비 대여 이자율 인하
  4. 조선인 어민의 자주적 어업권 보장

4. 결의대회와 해상 시위

1936년 5월 12일, 포항항 인근 공터에서 대규모 결의대회가 열렸습니다.
수백 명의 어민과 그 가족, 인근 농민, 상인들까지 모였고, 이들은 ‘바다는 우리 것이다!’, ‘일본 어업회사의 독점 철폐!’를 외쳤습니다.

결의대회 이후 어민들은 전면적인 어획물 판매 거부에 들어갔고, 일부는 작은 배를 타고 일본 회사의 어선 앞에서 해상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물 투하를 방해하거나, 일본 어선이 잡은 생선을 항구로 들이지 못하게 하는 행동도 이어졌습니다.


5. 일본 당국의 탄압

이 소식은 곧 일본 경찰과 헌병대에 전해졌습니다.
불과 이틀 만에 결의대회 주도자와 발언자 20여 명이 체포됐고, 조합 사무실은 압수수색을 당했습니다.
체포된 인물 중에는 조합장 김○○, 서기 박○○ 등 핵심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불온 집회 및 업무방해죄’로 기소되었습니다.

당국은 겉으로는 ‘질서 유지’를 이유로 들었지만, 실제 목적은 조선인 어민들의 단결을 뿌리째 뽑는 것이었습니다.


6. 남겨진 기록과 증언

당시 포항 어민 이○○의 회고록에 따르면,

“우리는 바다가 있어도 굶었다. 일본 회사는 고기를 빼앗고, 빚을 지게 하고, 결국 사람까지 부려먹었다. 그때 결의대회에서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이 회고는 단순한 경제적 불만이 아니라, 민족적 모멸감과 생존권 박탈에 대한 분노가 결합된 항일운동이었음을 보여줍니다.


7. 사건의 의의

  • 생활권 항일운동: 단순한 정치 구호가 아니라, 생존과 직결된 문제를 계기로 한 항일투쟁이었다.
  • 집단행동의 힘: 개인이 아니라 조직적으로 대응해 일본 경제권에 타격을 주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지역사회 연대: 어민뿐 아니라 농민, 상인, 가족들이 함께 참여해 지역 차원의 저항을 만들었다.

8. 이후의 영향

비록 사건은 일본의 탄압으로 조직이 해산되었지만, 이 투쟁은 인근 영덕·울진·삼척 등지로 확산되었습니다.
해방 이후 수산업 협동조합 설립 과정에서 포항 어민조합의 활동 경험이 큰 밑거름이 되었으며, 이후 어민들이 어업권을 되찾는 과정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9. 결론

경북 포항 어민조합 항일 결의 사건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어민들이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억압에 맞서 집단적으로 목소리를 낸 사건입니다.
비록 당장의 승리는 거두지 못했지만, 그들의 함성은 해방 후 어민 자치권 회복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바다의 자유와 권리의 초석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