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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경성 봉제공장 여공 파업 사건 (1933) — 침묵을 깨고 외친 여공들의 정의로운 함성

by skillplanner80 2025. 8. 13.

경성 봉제공장 여공 파업 사건 (1933) — 침묵을 깨고 외친 여공들의 정의로운 함성

1. 사건 개요

1933년 경성(현 서울)에서 발생한 봉제공장 여공 파업 사건은, 열악한 작업환경과 임금 체불 문제에 시달리던 여성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권리를 요구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당시 조선의 봉제산업은 일본의 군수물자 생산과 상업 수출품 공급 체계의 하청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그 생산 현장의 중심에는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파업은 단순히 임금 문제에 대한 반발을 넘어, 여성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여 조직적 행동을 전개한 사례로, 일제강점기 노동사와 여성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경성 봉제공장 여공 파업 사건 (1933)


2. 역사적 배경

2-1. 1930년대 경성의 봉제산업

1930년대 초 경성에는 크고 작은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이들 공장은 대부분 일본인 자본가가 소유하고 있었으며, 생산 품목은 군복, 속옷, 작업복, 그리고 일본 본토와 해외에 수출되는 의류 제품 등이었습니다.

봉제공장의 생산 인력은 대부분 15세에서 25세 사이의 젊은 여성 노동자였으며, 시골에서 올라온 소녀들이 가족 생계를 위해 취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주어진 현실은 가혹했습니다.

  • 하루 12~14시간의 장시간 노동
  • 환기와 난방이 되지 않는 비위생적인 작업장
  • 날카로운 재봉틀 바늘과 가위에 의한 상해
  • 생리휴가나 병가 없이 무조건 출근 강요
  • 일본인 관리자와 조선인 노동자 간 임금 차별

2-2. 임금 체불과 차별

경성의 봉제공장들은 일본인 노동자에게는 월급을 제때 지급했지만,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에게는 1~3개월씩 임금을 미루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또한 같은 일을 해도 일본인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조선인 여성 노동자의 2배 이상이었고, 숙련도가 높아져도 임금 인상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인 여성 노동자들의 불만을 점점 키웠고, 노동자들 사이에 “우리가 뭉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습니다.


3. 사건의 발단

1933년 4월, 경성의 한 대형 봉제공장에서 임금이 석 달째 지급되지 않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일본인 관리자는 “본사에서 자금이 오지 않았다”는 핑계를 댔지만, 노동자들은 같은 시기에 일본인 노동자들에게는 월급이 정상적으로 지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공들 사이에서는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일부 숙련공들이 중심이 되어 파업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당시 활동하던 비공식 노동조직과 접촉하여 파업 경험과 대책을 공유받았습니다.


4. 파업의 전개

4-1. 공장 점거

1933년 5월 2일, 아침 작업이 시작되자마자 여공 약 150명이 기계 앞에서 작업을 멈추고 ‘임금 지급’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일부 노동자들은 기계의 전원을 끄고, 문을 걸어 잠가 일본인 관리자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곧 공장 점거 파업으로 발전했습니다.

4-2. 경찰 개입

일제 경찰은 이를 “질서 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곧바로 진압에 나섰습니다.
공장 앞에는 경찰과 헌병이 배치되었고, 파업 지도부 10여 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공장 내부에 남아 있던 여공 100여 명은 경찰이 퇴거 명령을 내려도 자리를 지키며 농성을 이어갔습니다.

4-3. 언론 보도와 확산

당시 일부 조선인 기자들이 이 사건을 취재해 신문에 보도하면서, 다른 봉제공장과 방직공장 여성 노동자들에게까지 소식이 퍼졌습니다.
일부 공장에서는 동정 파업이 벌어졌고, 이는 경성뿐 아니라 인천, 평양 등지의 봉제업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5. 파업의 결과

5-1. 부분적 성과

이 파업은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부 성과를 냈습니다.

  • 체불된 임금 중 절반가량이 지급
  • 하루 노동시간 1시간 단축(비공식적 합의)
  • 숙련공 임금 인상 약속

그러나 일본인 관리자의 차별과 공장의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5-2. 노동자 연대 의식 강화

이 사건을 계기로 경성의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 ‘연대’와 ‘집단행동’의 가능성이 널리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이후 다른 산업 부문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이 이어졌습니다.


6. 역사적 의의

6-1. 여성 노동운동의 전면 등장

경성 봉제공장 여공 파업 사건은, 여성 노동자들이 단순히 피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행동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이 사건은 조선의 노동운동사에서 여성의 존재감을 각인시켰습니다.

6-2. 조선 노동운동과 민족운동의 연결고리

당시 조선의 노동운동은 단순한 임금 투쟁을 넘어 민족적 독립의식과 결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봉제공장 여공 파업 역시 일본인 자본가의 차별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7. 오늘날의 시사점

이 사건은 오늘날에도 다음과 같은 교훈을 줍니다.

  1. 노동자의 권리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 — 권리 침해에 침묵하면 착취는 지속됩니다.
  2. 연대의 힘 — 개별적으로는 약한 존재라도, 함께 뭉치면 사회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3. 여성 노동자의 역사적 역할 재조명 — 산업화 이전에도 여성 노동자는 중요한 경제·사회적 주체였습니다.

8. 결론

1933년 경성 봉제공장 여공 파업 사건은 단순한 노동쟁의가 아니라, 일제강점기 조선 여성들이 불평등과 차별에 맞서 외친 정의로운 투쟁이었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은 오늘날 노동권과 여성권이 존중받는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으며, 우리는 이 역사를 기억하고 계승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