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의 교육 통제에 맞선 신념의 저항
― 1935년 원산 기독교학교 폐교 항의 운동
🔎 1. 들어가며: 교육은 지켜야 할 ‘믿음’이었다
1935년, 함경남도 원산. 조선 북부 해안도시에 위치한 이곳은 한때 개항장으로 번영했던 도시이자, 선교사들이 뿌리를 내리고 다양한 기독교학교를 세웠던 교육의 요지였다. 그러나 조용했던 이 도시가 1935년 갑자기 ‘폐교’ 소식으로 술렁였다.
일제가 강제한 ‘신사참배’ 명령에 항거하며, 원산의 기독교학교들이 학교 문을 스스로 닫은 사건,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조명할 **‘원산 기독교학교 폐교 항의 운동’**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폐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종교와 교육의 자유, 민족적 양심, 그리고 믿음에 대한 최후의 저항이었다.
⚠️ 2. 배경: 신사참배 명령과 일제의 문화 침탈
1930년대 중반, 일제는 조선인의 정신을 지배하기 위한 본격적인 ‘내선일체’ 정책을 추진했다. 그 중심에는 신사참배(神社參拜) 강제가 있었다.
신사참배란 일본의 국교적 존재인 ‘천황’과 '신(神)'을 경배하는 것으로, 조선인들에게 천황을 신으로 섬기도록 강요하는 정책이었다.
- 1935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모든 공립·사립학교에 신사참배를 명령함
- 신사참배는 단지 행사 참여가 아니라 절을 하며 신을 섬기도록 요구하는 종교 행위
이 정책은 기독교계에 있어 명백한 우상숭배 강요였고, 신앙의 정체성과 완전히 충돌하는 것이었다.
⛪ 3. 원산의 기독교학교들, 끝내 ‘폐교’라는 선택
원산은 당시 기독교 선교 교육의 중심지였다.
원산 영명여학교 | 미국 남장로교 | 여성 교육 중심, 조선 최초의 여학교 중 하나 |
원산 성경학교 | 미국 북감리교 | 신학 교육과 인재 양성 기관 |
원산 신학교 | 장로교 | 목회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 |
1935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본격화되자, 원산의 기독교학교들은 참배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가는 컸다.
- 참배 불응 =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간주
- 교장 및 교사 체포 압박
- 교과서 검열 및 폐지
- 재정 지원 중단
결국, 원산의 여러 학교들은 강제 통폐합 또는 자진 폐교라는 결정을 내렸다.
교육보다 믿음을 택한 것이다.
👩🏫 4. 항거의 의미: “우리는 굴복할 수 없다”
당시 원산의 교사와 학생들은 정부의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았다. 특히 여학교의 교사들은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선의 여성을 가르치는 우리는,
하늘 아래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한다.
이 신사 앞에 무릎 꿇을 수 없다.”
학생들 또한 수업 거부, 기도회, 항의 서명운동 등으로 연대하였다. 어떤 이들은 퇴학을 감수하고 거부했으며, 어떤 교사들은 투옥되거나 일본으로 강제 이송되기도 했다.
🧭 5. 조선교육의 ‘신앙적 저항’ — 전국으로 확산되다
원산의 이 사건은 전국의 기독교학교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이후:
- 평양숭실학교, 이화학당, 장로회신학교 등에서도 집단 항의
- 선교사들은 조선총독부에 국제적 항의 서한 발송
- 해외 기독교 단체들, 조선의 종교 자유 억압 문제를 국제무대에서 제기
이는 단순한 지역 사건을 넘어, 민족 신앙과 교육의 자유 수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 6. 일제의 대응: 폐교 → 교육 말살 → 정신적 지배 강화
일제는 기독교학교의 저항을 철저히 탄압했다.
- 선교사 추방
- 기독교 계열 교장·교사 면직
- 기독교계 서적·교과서 폐기
- 조선 교육령 강화 (일본어 중심, 천황 숭배 교육 의무화)
결과적으로 조선인의 교육 자율성은 철저히 침해당했으며,
정신적 지배를 위한 수단으로 학교가 전락해버렸다.
🕊️ 7.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메시지
1935년 원산의 기독교학교 폐교 항의는 단순한 '교육 중단'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차지하던 믿음과 양심,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묻는다:
- 교육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신념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는가?
현대의 교육은 자유롭고 다양하지만,
그 자유와 권리는 수많은 저항과 희생의 토대 위에 놓여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마무리: ‘문을 닫은 학교’가 지켜낸 민족의식
‘문을 닫은 학교’는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그 문을 닫음으로써,
그들은 조선의 민족정신과 신앙을 더 크게 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원산의 교사들과 학생들,
그리고 그들의 침묵과 눈물이 역사의 바탕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자유롭게 믿고,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과서 항의 사건 (1939)― 식민지 조선의 여성 의학도들이 보여준 지성의 저항 (3) | 2025.08.10 |
---|---|
📚 일제에 맞선 어린 저항의 불꽃― 1927년 충청북도 보은 보통학교 동맹 휴학 사건 (2) | 2025.08.09 |
일제 강점기, 철창 안에서 울려 퍼진 외침― 경남 진주형무소 수감자 집단 단식 사건 (1928) (3) | 2025.08.09 |
🎨 경성 조선여자미술학교 통제 항의 사건 (1937)― 붓을 든 저항, 침묵을 거부한 예술학도의 외침 (5) | 2025.08.08 |
📌 함흥농업학교 학생 항일 시위 사건 (1929)― 조용한 북녘의 농업학교에서 울려 퍼진 민족의 외침 (2) | 2025.08.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