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에 맞선 어린 저항의 불꽃
― 1927년 충청북도 보은 보통학교 동맹 휴학 사건
1️⃣ 시대적 배경: 조선의 교육, 식민 지배의 도구가 되다
1920년대 후반은 일제의 **‘문화통치’**라는 이름 아래
조선인에 대한 보다 교묘한 정신적 지배가 강화되던 시기였다.
특히 교육은 민족정신을 제거하고 일본에 충성하는 신민(臣民)을 양성하기 위한 핵심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 일본어 교육 강화
- 일본인 교장·교사 우선 임명
- 조선사 교육 축소 및 검열
- 일본 ‘국민윤리’ 중심의 교과 확대
이러한 흐름 속에서 충청북도 보은에 있는 한 작은 학교,
보은 보통학교의 학생들이 집단적인 침묵의 항거를 시작했다.
그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교문 밖으로 나아가 민족의식을 외쳤다.
이는 단순한 학업 거부가 아닌, 식민 권력에 대한 집단 저항이었다.
2️⃣ 사건 발단: 조선인 교사 탄압과 차별 교육
보은 보통학교는 원래 지역 주민들과 지방 유지들이 주도하여 세운 학교였다.
하지만 일제가 학교 운영을 강제로 장악하면서,
일본인 교장 부임, 조선인 교사의 권한 축소, 학교 운영 자율성 박탈 등이 이어졌다.
그러던 중 1927년 봄,
당시 존경받던 조선인 교사 A씨가 일본인 교장의 지시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부당 해임된다.
이 일은 학생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됐고, 분노와 슬픔은 결심으로 이어졌다.
“조선인 선생님이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쫓겨나나요?”
― 당시 5학년 재학생의 증언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여 학생들은 결국 단체로 등교 거부, 수업 보이콧,
학교 측에 항의서한 전달, 학부모와 지역 유지 설득 등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동맹 휴학 운동을 전개했다.
3️⃣ 동맹 휴학의 전개: 교문은 닫혀도, 의지는 열렸다
보은 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은 단순한 며칠간의 파업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조직 아래 치밀하게 계획된 항의였고,
학교 내부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촉매가 되었다.
- 약 80명 이상 학생 동참하였음.
- 일본인 교장에게 직접 면담 요청하였음
- 일부 학생은 지역 교육청에도 탄원서 제출하였음
- 학부모들은 학교에 항의 방문, 일부는 자녀 자퇴 선언하였음
특히 6학년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며 하급생을 보호하고
보복성 징계에 대응한 점은 이 운동의 자기조직화 수준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4️⃣ 일제의 대응: 탄압과 무마, 그리고 침묵
학생들의 동맹 휴학은 일제 당국의 시각에서 보면 매우 불온한 행위였다.
즉시 다음과 같은 강경 조치가 시행된다.
- 주동 학생 6명 퇴학되었음.
- 조선인 교사 3명 좌천되었음.
- 학부모 대상 협박 및 연행되었음
- 지역 언론 보도 금지 및 사건 은폐 시도됨
일제는 특히 이 사건을 외부로 알려지지 않도록 막기 위해
철저하게 보도 통제를 실시했다.
하지만 사건의 여파는 인근 괴산, 청주 등 인근 지역 학교로 확산되며
‘조선인 교사에 대한 정당한 대우’, **‘차별 없는 교육’**을 요구하는
다양한 작은 움직임들이 이어졌다.
5️⃣ 조선의 아이들이 보여준 ‘의연한 민족혼’
이 사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참여한 대부분의 학생이 초등 고학년 또는 10대 초반의 아동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국가도, 조직도, 거대한 사상도 없이
단지 자신의 선생님을 지키기 위한 마음,
그리고 정의롭지 않다는 감각 하나로 행동했다.
한 언론인이 사건 이후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어른들이 하지 못한 민족운동을
아이들이 교실에서 시작했다.”
6️⃣ 교육 독립의 싹, 보은에서 움트다
보은 보통학교의 동맹 휴학은
조선 전역의 학교 항의 운동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이는 이후 1930년대 경성, 평양, 함흥 등지에서 발생한 교육 항거 사건들의
전조(前兆)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 전국적 학생 운동의 불씨가 확산됨
- 선교계 및 민립학교 중심으로 자율 교육에 대한 관심 증가
- 학부모들의 교육 참여 의식 고양
단순한 소규모 항의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 교육 독립운동의 시작점 중 하나였다고 평가된다.
✅ 마무리: 교문 밖으로 외친 아이들의 목소리
1927년 충청북도 보은.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며 세상에 조용히 외쳤다.
"우리는 불의한 교육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지킬 줄 아는 조선인입니다."
이 작은 외침이
민족 교육의 뿌리가 되었고,
일제의 그림자 아래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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