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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 경성 조선여자미술학교 통제 항의 사건 (1937)― 붓을 든 저항, 침묵을 거부한 예술학도의 외침

by skillplanner80 2025. 8. 8.

🎨 경성 조선여자미술학교 통제 항의 사건 (1937)

― 붓을 든 저항, 침묵을 거부한 예술학도의 외침


1. 시대 배경: 창작의 자유를 억압한 일제

1930년대 후반, 조선은 점점 더 강력한 통제의 시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며,
조선 내 식민통치를 더욱 강화했고, 특히 사상 통제와 교육기관에 대한 개입을 확대했다.

그중에서도 예술은
민족의 정체성과 감정을 표현하는 강력한 도구였기에
일제는 더욱 민감하게 대응했다.
그 결과 조선 내 미술학교 역시 검열과 억압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시위하는 여학생들


2. 조선여자미술학교의 설립과 역할

경성 조선여자미술학교
조선 여성들에게 미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교육기관이었다.
1920년대 말 설립되어,

  • 회화, 조각, 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교육을 진행하며
  • 조선 여성의 창작활동을 독려하고
  • 예술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이 학교는 서양화, 민족예술, 전통 채색화 등 다양한 분야를 균형 있게 다루며
여성 예술인의 사회 진출까지 연결시키는 진보적 교육기관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단지 미술교육기관으로 보지 않았다.
“민족적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창작의 온상”이라 판단하고
점차 통제의 수위를 높여갔다.


3. 통제의 시작: 일본 총독부의 개입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일제는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황국신민화’ 정책을 본격화했다.
그 일환으로 조선여자미술학교에도

  • 커리큘럼의 일본화,
  • 일본 회화 중심 교육,
  • 조선 전통미술 및 민족 색채 작품의 배제,
  • 일본인 교사 배치 확대 등
    무리한 지시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학교 내 민족회화 전공은 사실상 폐강 수순을 밟게 되었고,
학생들은 “국체를 찬양하는 미술”을 그려야만 졸업작품으로 인정받았다.


4. 항의의 시작: 예술을 지키려는 결기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7년 10월경, 미술학교 3학년생들을 중심으로
은밀한 항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학생들은 회의와 토론을 거듭하며
자신들이 겪는 표현의 자유 제한, 민족적 정체성 말살,
비조선적 예술 강요 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고,
결국 교장과 일본인 교수진에게 공식 항의서한을 제출했다.

항의서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조선 여성에게도 예술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 “창작은 강요로 이뤄질 수 없다.”
  • “조선화는 일본화보다 못하다는 편견을 철회하라.”
  • “우리는 황국신민이 아니다. 우리는 예술가다.”

이는 단순한 민원 수준을 넘어선 사상적 저항 선언이었다.


5. 대응과 탄압

이 항의서한은 곧바로 일본 총독부에 보고되었고,
‘불온 사상 조장 사건’으로 분류되었다.

일제는 학교 측에

  • 해당 학생 전원 퇴학 조치 권고
  • 학교의 폐쇄 검토
  • 재단에 대한 보조금 삭감
    등의 압박을 가했다.

결국 항의에 참여한 주요 학생 5명이 퇴학을 당했으며,
3명은 이후 경찰에 의해 ‘사상 교양 수사’라는 명목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이후 학교 측은 어쩔 수 없이 항복 선언문을 발표하고
민족예술 관련 강의 전면 폐지, 일본 미술 사조 중심으로 교과 재편성을 단행했다.


6. 예술과 저항의 경계

비록 이번 항의로 직접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이 사건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① 조선 여성의 자발적 예술 저항

  • 그 당시 여성 학생들이 스스로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냈다는 것 자체가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② 창작의 자유를 위한 실질적 움직임

  • 단순한 불만 표출이 아니라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철학적 질문까지 함께 던진 운동이었다.

③ 이후 여성예술계에 미친 파급효과

  • 사건 이후, 퇴학당한 일부 학생들은
    평양, 만주, 상해 등지로 넘어가 독자적으로 미술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후에 ‘민족예술 운동’에 중요한 인물로 성장한다.

7. 묻혀버린 예술의 기록

이 사건은 공식적인 독립운동사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당시의 언론 역시 대부분 ‘불온사건’으로 왜곡 보도하거나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사 연구자들은
이 사건을 **‘조선 예술계 최초의 조직적 항의운동’**으로 평가하며,
일제의 문화통제 속에서
“예술로 민족을 지키려 했던 시도”로 조명하고 있다.


8. 마무리: 붓으로 그린 항거의 역사

1937년 경성 조선여자미술학교.
그 작은 교실에서 붓을 든 소녀들은 침묵을 거부했다.
그들은 자유를, 민족을, 예술을 말하고자 했고
비록 탄압당했지만 그 외침은 이후의 역사에 강한 울림을 남겼다.

우리는 이제 그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예술은 단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한 민족의 존엄을 지키는 무기였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