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성 미곡상 조선인 상인 파업 사건 (1936)
― 일제 식민경제에 맞선 조선 상인들의 조용한 봉기
1. 시대의 배경: 일제의 식민지 경제 구조와 조선 쌀
1936년은 일제강점기의 한가운데였다.
조선은 이미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철저히 편입되었으며,
그중 가장 중심이 되는 식민 수탈 자원은 바로 **쌀(米)**이었다.
쌀은 조선인의 주식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본토의 식량 수급에 중요한 원천이었다.
일제는 조선 내에서의 쌀 유통을 장악하고,
이를 일본으로 대량 반출하면서
조선인들의 식량 부족과 물가 상승을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본 이들이 바로
경성(서울)에서 미곡을 유통하던 조선인 상인들이었다.
2. 사건의 발단: 불공정한 유통 구조
당시 조선총독부는 일본 자본가와 일본 상인에게 유리한 미곡 유통 구조를 구축했다.
그 구조는 다음과 같다:
- 쌀 반출을 위한 사전 매집 허용: 일본 상인들이 쌀을 미리 대량으로 싸게 사들임
- 조선인 상인에 대한 거래 제한: 조선인 상인에게는 쌀 매입 제한 및 통제
- 미곡시장 거래세 차등 부과: 일본 상인은 낮은 세율, 조선인은 높은 세율
- 가격 통제 정책: 시장 자율이 아닌, 일본 총독부가 통제하는 낮은 가격 강제
그 결과 조선인 상인들은 이윤을 낼 수 없는 구조에 갇혀버렸고,
수입은 급감한 반면 일본 상인들은 폭리를 취했다.
이에 경성 미곡상 조합 소속 조선인 상인들은
1936년 8월, 전면적인 집단 파업을 선언했다.
3. 파업의 전개: 조용하지만 단호한 저항
경성의 조선인 미곡상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파업을 실행했다:
- 전국 쌀 거래 중단
→ 조합 내 조선인 상인 80% 이상이 쌀 매입·판매를 중단 - 시장 보이콧 운동
→ 일본인 상점으로의 구매 중단 운동도 병행 - 공동선언문 발표
→ "우리는 죽어도 일본 자본에 들러리 서지 않겠다." - 식량 자조운동 연계
→ 조선 쌀을 조선인이 지키자는 식량 자립 선언도 포함
이러한 움직임은 일제의 예상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졌다.
경성을 시작으로, 인천·수원·개성·평양 등의 도시 상인들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4. 일제의 탄압과 반격
일제는 이를 단순한 경제 문제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민족 자본이 일본 자본에 반기를 들었다"**는 시각으로 바라보았고,
이를 위험 요소로 판단한 조선총독부는 즉각적인 탄압에 나섰다.
🔥 주요 탄압 조치:
- 파업 주도자 검거: 주요 상인 37명 체포 및 취조
- 미곡 조합 강제 해산: 조선인 중심의 조합은 해산되었고
→ 일본인 중심의 조직으로 재편 - 시민단체 탄압 확대: 자조운동, 소비조합 운동에도 ‘좌익’ 혐의 씌움
- 언론 검열: 조선일보, 동아일보 관련 보도 기사 삭제 지시
그러나 조선인 상인들은 이 탄압 속에서도 몇 달간 판매를 거부하며
**“식량을 무기 삼아 버티는 경제투쟁”**을 이어갔다.
5. 사건의 의의와 성과
결국 일본은 쌀 유통 구조를 일부 완화하고,
조선인 상인들에게 제한적으로 쌀 매입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사태를 봉합했다.
비록 파업이 완전한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의미를 남겼다.
✊ 1) 민족 자본의 조직적 항거
- 이 사건은 상업 자본가들이 단결하여
식민 경제 구조에 저항한 대표 사례다. - "민족 자본도 독립운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 2) 자조경제운동의 촉진
- 이후 협동조합, 소비조합, 농촌 자립운동 등에
영향을 주며 경제민족주의를 촉진했다.
✊ 3) 상업계 독립운동의 초석
- 단순한 경제 파업을 넘어서
경제적 독립 없이는 정치적 독립도 없다는 이념 확산
6. 오늘날의 시사점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정치적 투쟁이 아닌 경제적 저항이어서
- 비폭력적이고 서서히 진행된 파업이어서
- 기록의 대부분이 일본 상공회의소 중심 문건에 한정되어 있어서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사건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사에서 ‘자생적 민족 자본’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소상공인이 자본의 논리로 밀려나는 현시점에서,
경성 미곡상 조선인 상인의 파업은 교훈적 역사다.
🔚 마무리하며
이 파업은 단지 쌀을 둘러싼 이익다툼이 아니었다.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 살아가던 상인들이
자신의 민족, 삶,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조용하고도 단호한 독립운동이었다.
“우리는 이윤보다 민족을 택했다”는 조선 상인들의 선택은
지금도 충분히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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