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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 함흥농업학교 학생 항일 시위 사건 (1929)― 조용한 북녘의 농업학교에서 울려 퍼진 민족의 외침

by skillplanner80 2025. 8. 8.

📌 함흥농업학교 학생 항일 시위 사건 (1929)

― 조용한 북녘의 농업학교에서 울려 퍼진 민족의 외침


1. 북방의 소도시, 함흥에 울려 퍼진 함성

1929년 늦가을, 함경남도 함흥.
추수가 끝난 시기, 겨울을 앞둔 적막한 북녘 땅에서 뜻밖의 학생 시위가 일어났다.
바로 함흥농업학교(현 함흥농고) 학생들의 조직적 항일 시위였다.

이 사건은 대규모 유혈충돌이 없었기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광주학생운동과 연계되며 전국적 항일 시위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다.

시위에 앞장선 학생들


2. 배경: 민족차별과 억압의 식민지 교육 현실

일제강점기, 조선에서의 중등교육은 철저히 식민지 통치에 복무했다.
특히 농업학교는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 농업 산업의 하위 노동력’으로 길들이는 장으로 전락했다.

함흥농업학교는 조선인 학생이 대다수였지만,

  • 일본인 교사들의 차별적 언행,
  • 일본인 학생들과의 불공정한 대우,
  • 학교 내 일어 상용 강요,
  • 민족사 및 조선어 수업의 축소,
    등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당시 학생들은 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자존감이 무너지고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우는 현실을 견뎌야 했다.


3. 촉발: 광주학생운동의 파장

1929년 11월 3일, 광주역에서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한 일본인 남학생과 이를 제지한 조선 학생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적으로 민족 감정을 자극했다.

이 소식은 함경도까지 퍼졌고,
함흥농업학교 학생들은 일제히 ‘우리도 행동해야 한다’며 결의를 다졌다.

당시 비밀리에 결성된 학생 조직은

  • 시위 일시 및 구호,
  • 참여자 역할 분담,
  • 경찰의 대응 시 행동 지침 등을 사전 계획하였다.

결국 1929년 11월 말, 함흥 시내 곳곳에서
“조선인 차별 철폐!”, “교육은 민족의 것이다!”, “일본인 교사 퇴출!”이라는 구호가 외쳐졌다.


4. 시위 전개와 일제의 대응

시위는 학교 정문 앞에서 시작되었다.
약 80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와
함흥시내 주요 거리를 행진하며 민족차별에 항의하는 연설을 이어갔다.

학생들의 외침은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도 빠르게 확산되었고,
일제 경찰은 즉각 출동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학생들은 도망치거나 숨어들지 않고,
일제히 다음과 같이 외쳤다:

“조선 교육은 조선인의 것이다!”
“차별에 침묵하지 않겠다!”
“우리도 독립을 꿈꾼다!”

결국 경찰은 30여 명의 학생을 연행하였고,
그 중 8명은 퇴학 조치, 3명은 형사 처벌까지 받게 된다.


5. 지역 사회와의 연대

흥미로운 점은, 이 사건이 단순한 학교 내 시위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흥 지역의 일부 기독교계 목회자, 한글교사, 출판업자 들이
학생들을 비공식적으로 지지하고,
시위 내용을 함경북도, 평양 등지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비공식 민중 연대
1930년대 초반 북부 지역 청년운동의 성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6. 의미와 역사적 평가

① 북부 지역의 항일운동으로서 가치

  • 대부분의 항일운동이 경성, 평양, 광주 중심으로 기록된 반면,
    함흥 사건은 지방 교육기관에서 일어난 독립적 민족운동 사례이다.

② 학생 자발 조직의 형태

  • 외부 지시나 주도 없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위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했다는 점에서
    자치적 항일 정신이 두드러진다.

③ 여성 학생들의 참여도 주목

  • 당시 농업학교에도 일부 여학생이 있었고,
    이들 역시 시위에 참여해 ‘조선 여성의 항일 의식’이 드러난다.

7. 이후의 전개와 영향

시위 이후, 함흥농업학교는

  • 교사 교체,
  • 학칙 강화,
  • 경찰 상시 배치 등으로 분위기가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함흥을 비롯한 북부 지역 학생운동의 흐름은
이 사건 이후 평양, 청진, 함흥 등지로 퍼져나가며
1930년대 초 사회주의계 조선청년운동에 간접적 토대가 되었다.

이처럼 함흥농업학교의 학생 항일 시위는
단기적 승리보다 장기적 민족의식의 확산에 기여한 사건이라 평가된다.


8. 마무리: 북녘 땅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저항의 불꽃

‘작은 지방 농업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겠어’라는 말로
지워질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지금도 침묵 속에서 싸웠던 학생들의 용기와 민족 사랑을 증명한다.

책 대신 태극기를 들고, 학문 대신 정의를 외친 그들의 이야기
오늘날 우리의 교육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되묻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