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남포 노동야학 탄압 사건 (1933)
― 배움의 권리를 빼앗긴 조선의 노동자들
1. 1930년대 조선, 어둠 속의 빛이 된 야학
일제강점기 조선의 현실은 ‘무지(無知)’와 ‘빈곤’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무력으로 지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상과 지식, 교육에서도 철저하게 통제했다.
1930년대 초반 조선의 문맹률은 약 70%에 달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환경에 처한 이들은
도시와 공장 지역의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에게 **야학(夜學)**은 단순한 공부방이 아니었다.
하루 10~12시간을 넘게 일하고 돌아와
밤늦게까지 배우는 ‘희망의 학교’였다.
야학은 한글과 산수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조선의 역사와 현실을 알려주고,
때론 사상적 의식을 깨우치는 ‘계몽의 공간’이었다.
2. 황해도 진남포, 노동야학의 중심지
진남포는 황해도에서 가장 활발한 항구도시였고,
1920~30년대에는 철도 노동자, 운수 노동자,
항만 하역 노동자, 수공업자 등이 몰려 살았다.
일제의 산업화 정책 아래
진남포는 급속도로 도시화되었지만
노동자들은 극심한 저임금, 장시간 노동, 교육 소외에 시달렸다.
이에 진남포 지역에서는 노동자들 스스로
야간 노동야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조합비를 모아 교사를 섭외하고,
폐가나 사찰 등을 빌려 수업을 진행했다.
주요 교육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한글 교육 (읽기·쓰기)
- 초등 산수
- 역사와 시사
- 민족의식 고취 강의
- 노동법 및 권리 관련 지식
이러한 교육은 일제에게 ‘단순한 학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상적 불온물’로 간주하고
진남포 노동야학에 대한 내사와 감시를 강화했다.
3. 1933년, 강제 폐쇄와 탄압의 시작
1933년 봄, 진남포 지역 경찰서와 경무국은
야학 관계자 중 일부가 사회주의계열 인사와 접촉했다는 이유로
야학 전면 조사에 나섰다.
결국 6월,
다음과 같은 탄압 조치가 단행되었다:
❌ 노동야학 폐쇄 명령
- 진남포 시내 5개 야학 강제 폐쇄
- 운영 교사 및 운영진 모두 소환 조사
❌ 주요 관계자 체포
- 교사, 운영위원, 후원자 등 14명 체포
- 그중 7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됨
→ 조선의 평등사상, 자치주의 교육이 이유였다
❌ 인쇄물·교재 압수
- 조선사, 자주권 관련 자료를 불온물로 간주해 몰수
- 심지어 일부는 한글 교재조차 폐기 처분됨
이 탄압은 단지 ‘정치적 경계선’을 넘었기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가 깨어나는 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전략적 통제였다.
4. 야학의 사회적 파장과 전국적 연대
진남포 노동야학 사건은 단지 지역 내 탄압에 그치지 않았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평양, 신의주, 서울, 대구 등
다른 지역의 노동계와 교육운동계가 연대 성명을 냈다.
특히 평양에서는
"학문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목숨을 빼앗는 것과 같다"는 성명과 함께
노동야학 재건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통해
"야학은 사상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보도되었고,
이로 인해 일제는 야학 전반에 대한 검열과 규제 강화에 나섰다.
5. 진남포 야학 사건의 역사적 의의
이 사건은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가진다:
✅ 1) 민중 주도의 교육운동 사례
- 국가나 종교 단체가 아닌,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교육의 장이었다. - 이는 근로민중의 계몽 주체화라는 측면에서
조선 교육운동사에 큰 의미를 가진다.
✅ 2) 교육을 통한 저항
- 총칼 없이, 책과 연필로
일제 식민지 통제에 맞선 독립운동이었다. - ‘글을 아는 자는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조선 민중의 자기 보호 본능이기도 했다.
✅ 3)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교육권 담론
- 진남포 야학 탄압은 단지 1933년의 사건이 아니다.
- 오늘날에도 교육의 기회가 박탈되는 현실에서
배움의 평등권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역사적 이정표가 된다.
6. 마무리: 책과 펜으로 외친 조용한 독립운동
진남포 노동야학 사건은 격렬한 투쟁이 아니었다.
폭력이 아닌, 조용한 교육과 지식의 힘이었다.
하지만 일제는 그 지식의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조선인 스스로가
“나는 배우겠다. 나는 깨달을 것이다.”
라고 외치는 위대한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교육을 통해 스스로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1930년대 조선 노동자의 목소리는
지금도 한국 교육운동의 뿌리이자 영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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