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한 톨에 담긴 항일의식
잊힌 민중의 저항, 쌀 방매운동 이야기
“이 쌀은 우리 것, 절대 팔지 마라”
1930년대, 한 시골 마을 저녁.
할머니는 장독대 밑에 쌀자루를 숨깁니다.
“우리도 배고픈데, 왜 쌀을 내놓지 않느냐”는 아이의 물음에
할머니는 낮게 대답합니다.
“이 쌀까지 빼앗기면, 우리 조선 사람은 다 굶어 죽고 말아.”
이 한마디에서 시작된 행동이, 전국적으로 번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쌀 방매운동의 시작입니다.
쌀, 조선 민중의 마지막 자존심
쌀은 단순한 식재료가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고,
한 집안의 땀과 희망,
그리고 민족의 정체성이 깃든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특히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 이후
조선의 쌀은 본토로 무차별 반출되었습니다.
조선 농민들은 힘겹게 수확한 쌀을 헐값에 일본에 넘겨야 했고,
정작 자신들은 보리밥·감자밥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해마다 논에서 쌀은 더 나왔지만,
내 밥상에 쌀밥이 사라진 건 그때부터였다.”
― 1932년 전남 농민 구술
방매운동, 조직 없이 퍼진 생활 속 저항
쌀 방매운동은 어느 유명 인물이 시작한 것도,
어떤 거대한 조직이 지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집, 가족, 마을, 시장에서
조용히 쌀을 숨기고
팔지 않는 방식으로 실천됐습니다.
할머니는 창고 밑, 장독 뒤,
학생은 가족을 설득해 쌀을 내놓지 않고,
상인은 일본인에게 쌀을 팔지 않았습니다.
마을마다 ‘쌀 팔지 않기’ 암묵적 약속이 생겨났고
모두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땀을 흘렸습니다.
일제의 수탈 정책과 민중의 고통
일제는 조선의 쌀을 빼앗기 위해
산미증식계획을 내세워 논의 면적을 인위적으로 늘렸지만
쌀값은 일본이 통제하고,
수확의 대부분을 일본으로 가져가
민중은 쌀밥을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 1927년 경성의 쌀값은 조선의 쌀 부족 탓에 폭등했고,
- 1932년 동아일보에는
“평양 농민들이 쌀을 장독 밑·나무 아래에 감추고, 일본인에게 팔지 않는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실제로,
전국적으로 쌀값은 오르고 민중의 끼니는 점점 궁핍해졌지만,
농민들은 단속의 두려움에도 쌀을 감추며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단속 온다, 쌀 숨겨라!”
일본 순사가 쌀을 찾으러 오면
동네 아이들은 쌀자루를 산속 움막, 이웃집, 장독 밑 등
여러 곳에 옮겨 숨겼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창고에 보리와 쌀을 섞어두거나
빈 자루를 위장으로 쌓아두기도 했습니다.
어떤 마을은 “쌀을 내놓는 집엔 이웃도 팔지 않는다”는
공동 약속을 만들어
단속이 오면 마을 전체가 똘똘 뭉쳐 숨겼습니다.
배고픔을 견디며 지킨 저항
쌀 방매운동에 참여한 많은 이들은
쌀밥 대신 보리, 조, 옥수수, 고구마, 감자,
심지어 풀뿌리까지 먹으며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보리밥을 먹을 때마다
집안에 숨겨둔 쌀자루를 떠올렸다.
배고픔보다, 쌀을 빼앗기는 수치가 더 아팠다.”
― 1934년 전북 완주 농민 증언
쌀 방매운동은
가난과 굶주림을 감내하면서
민족의 곡식 한 톨을 지키려는
위대한 생활 속 항일정신이었습니다.
일제의 단속과 민중의 창의성
일제는 방매운동을 막기 위해
농촌마다 순사와 관리들을 보내
창고·부엌·장독대·벽장까지 샅샅이 뒤졌습니다.
심지어 “쌀을 숨기면 마을을 불태우겠다”는 협박까지 했지만
농민들은 끈질기게 대응했습니다.
- 곡식을 섞어 감추기
- 위장 저장고 만들기
- 쌀을 이웃집·산속으로 옮기기
이런 다양한 방법이 마을마다 전승되어
일제의 단속을 번번이 무력화시켰습니다.
전국으로 퍼진 암묵적 연대
쌀 방매운동은 한 마을에서 시작됐지만
이웃 마을로, 도시로,
그리고 전국으로 번져나갔습니다.
농민, 학생, 상인, 주부, 아이들까지
모두가
“우리 쌀, 우리 손으로 지키자”
는 마음으로 힘을 모았습니다.
실제 기사·구술에 남은 운동의 기록
1930년대 신문을 보면
“쌀을 시장에 내놓지 않아 쌀값이 폭등했다”,
“조선 농민이 쌀을 일본 상인에게 팔지 않아 일본 상인들이 애를 먹고 있다”
같은 기사가 빈번히 실렸습니다.
현대 사학 연구와 구술 기록에도
“방매운동 덕분에 일본의 쌀 수탈이 계획만큼 이뤄지지 않았다”
“어린아이까지 단속에 대비해 쌀자루를 옮기는 역할을 맡았다”
등의 생생한 증언이 남아 있습니다.
생활 속 불복종, 오늘까지 이어지다
쌀 방매운동은 단순한 쌀 숨기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운동은
불매운동, 비밀 출판, 독립자금 모금, 학생·여성 주도 생활 항일운동 등
다양한 저항운동의 근간이 되었고
해방 이후 민주화운동, 사회운동의 씨앗으로 남았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쌀 방매운동은 이름도, 얼굴도 남지 않은
수많은 평범한 민중의 조용한 저항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 걱정 없이 쌀밥 한 공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은
그 시대 이름 없는 영웅들의
눈물과 결의, 그리고 생활 속 용기 덕분입니다.
“항일은 늘 칼과 총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가족을 위해, 동네를 위해,
쌀 한 톨을 끝까지 지킨 것이 바로 독립운동이었다.”
쌀밥 한 공기에 담긴 역사
혹시 여러분의 가족,
마을 어른들에게도
쌀을 숨겼던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나요?
이제 그 한 공기 쌀밥 앞에서
우리 모두 그 시절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참고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미증식계획, 쌀 방매운동]
- 독립기념관 ‘생활 속 항일운동’ 구술자료
- 1930년대 조선일보, 동아일보 기사
- 경북 봉화, 전남 나주 농민 구술 기록
- 현대 항일운동 연구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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