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잊혀진 땅의 눈물 ― 고려인 강제 이주, 그들의 1937년

by skillplanner80 2025. 7. 23.

잊혀진 땅의 눈물 ― 고려인 강제 이주, 그들의 1937년


“연해주를 떠나야 한다는 소식이 퍼진 날, 마을 전체가 숨죽였다.”

1937년 늦여름, 러시아 연해주 바닷가 작은 마을.
밭일을 하던 한인 가족들이 마을 어귀로 몰려나옵니다.
“사람을 태울 열차가 내일 도착한다더라.”
“그 먼 곳을, 왜 우리가 가야 하오?”
수군거림이 커지지만,
누구도 제대로 설명해주는 이는 없었습니다.

이날, 수십만 명의 한인들이
갑작스레 ‘국가의 명령’ 아래,
이 땅을 떠날 준비를 강요받았습니다.
고려인 강제 이주의 시작이었습니다.

 

강제이주당한 고려인


연해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뿌리 내린 땅

19세기 말,
많은 조선인들은 가난과 착취, 전쟁의 그림자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했습니다.
이곳은 새로운 시작의 땅이자
희망의 땅이기도 했습니다.

  • 농사를 짓고, 학교와 마을을 세우고
  • 한글 신문을 만들며
  • 아이들에게 조선의 말을 가르치고
  •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조국의 독립을 꿈꿨던 곳이었습니다.

연해주는,
일제의 식민지 치하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고자 했던 조선인들의
또 하나의 ‘조국’이었습니다.


1937년, 갑작스레 들이닥친 국가의 명령

하지만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의 소련 정권은
연해주 한인들을 “일제의 첩자 위험”이라며
강제 이주를 결정합니다.

“내일이면 이 마을에도 트럭이 온다더라.
두 손만 들고 집을 떠나야 한단다.”
― 당시 고려인 구술

이유도 설명도 없는 ‘국가 명령’.
“보따리 하나만 챙겨라”,
“집은, 소는, 밭은, 모두 두고 가야 한다.”
사람들은 마지막으로 집과 마당,
그리고 고이 가꾼 밭을 돌아봅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가 두려움과 혼란,
그리고 분노와 슬픔 속에
긴 이별의 여정을 준비했습니다.


열차에 실려, 끝없는 황무지로

며칠 뒤,
경찰과 군인들이 마을을 찾아와
한인 가족들을 트럭과 기차에 실어 날랐습니다.

수십 시간, 수백 시간이 넘는
끝없는 열차 여행.
좁은 객차에 빽빽이 실린 사람들,
숨이 턱턱 막히는 여름의 더위,
혹독한 겨울 밤의 추위.
배고픔과 병,
그리고 공포와 절망이
열차 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어린 동생이 그만 기차 안에서 세상을 떴다.
이름 없이, 땅도 없이,
기차길 어딘가에 묻혔다.”
― 고려인 2세 증언

이렇게 연해주 한인 약 17만 명이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낯선 땅으로
강제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의 첫 번째 겨울

기차에서 내리자
사방은 황량한 평원,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모래언덕.
도착한 고려인들을 기다리는 건
텅 빈 벌판과 반쯤 허물어진 막사 몇 채,
그리고
“여기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망적인 현실뿐이었습니다.

  • 물도 부족하고,
  • 식량은 모자라며,
  • 겨울엔 영하 30도가 넘는 혹한,
  • 집을 짓기 위한 자재도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고려인들은
곧바로 흙집을 짓고,
우물을 파고,
눈보라와 싸우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연대, 새로운 공동체의 시작

모든 것이 낯설고 적대적인 환경.
하지만 한인들은
서로 손을 맞잡았습니다.

  • 한글 학교를 다시 열고
  • 조선음식을 함께 나누고
  • 김치와 두부, 고추장을 만들며
  • 민족의 노래와 춤, 전통을 지켜냈습니다.

아이들은 중앙아시아 언어와 러시아어를 배워야 했지만
저녁이면
“아리랑”을 부르며
조선의 옛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 언어를 잃지 말라고
밤마다 어른들이 동화와 노래를 들려주었다.”
― 고려인 3세 회상

고려인들은 절망 속에서도
‘잊지 않는 것’이
곧 살아남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끝나지 않은 차별과 슬픔

그러나 이주 후에도
고려인들은 ‘외국인’, ‘불신의 대상’이었고
공산정권의 감시와 차별,
취업·교육 제한, 언어 금지 등
수많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 1950년대 고려인 청년의 일기

강제이주는
개인의 삶, 가족의 역사,
민족의 뿌리마저 바꿔놓았습니다.


21세기, 잊혀진 고려인들의 목소리

세월이 흐르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은
고향을 방문하거나
조상의 땅을 찾아 한국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왜 우리가 이곳에 있는가’
‘내 조상이 왜 쫓겨났는가’를
아직도 아프게 되묻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주 3~4세가 되어
이미 한국어를 잊었지만,
명절엔 조선음식과
한글 노래를 전하며
‘뿌리 잃은 정체성’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고려인 강제이주 사건은
조선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흔 중 하나입니다.

‘단지 외국인의 첩자일지 모른다’는
권력의 논리 앞에
한민족 17만 명의 삶이
강제로 뿌리째 뽑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은
새 땅에서 새로운 역사를 일구고,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지키며
세대를 이어왔습니다.

“고향에 가지 못해도
우리는 결코
고려인임을 잊지 않는다.”

― 카자흐스탄 고려인 노인회 구술


오늘 우리에게 남는 질문

강제이주는 끝났지만
상처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 고려인들이 지켜온 ‘정체성’과 ‘기억’
  • 한반도 밖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의지한 연대의 힘
  • 지금 이 순간
    낯선 땅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뿌리가
    뽑히고 있지는 않은가

조용한 밤,
우리는
고려인의 노래와 이야기,
그 강인함과 슬픔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참고자료

  • 국립민족박물관 ‘고려인 강제이주’ 전시자료
  • 고려인문화센터 구술자료
  • KBS 다큐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 1937년 소련 정부 문서·신문
  • 현대 항일사, 고려인 연구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