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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지지 않은 한국 근대사

대동강 물결 위, 자유를 외치다― 평양 유람선 봉기 사건의 하루

by skillplanner80 2025. 7. 27.

대동강 물결 위, 자유를 외치다

― 평양 유람선 봉기 사건의 하루

유람선 갑판 위, 조선인 승객들이 일본 순사에게 격렬히 저항하는 순간


“오늘은 그냥 구경만 하고 싶었습니다”

1930년대 초, 평양 대동강.
따뜻한 봄날,
많은 조선인들이 유람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강 위를 가르며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강변 풍경을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그날 유람선에는
평범한 하루와는 전혀 다른
숨은 긴장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강이 아름다워도,
우리 삶은 늘 검은 그림자 아래 있었습니다.”


대동강 유람선, 조선인의 쉼터이자 감시의 공간

대동강 유람선은
평양 시민의 휴식처였지만
일제강점기,
경찰과 헌병들의 감시가
늘 따라다녔습니다.

  • 일본 순사들은
    선상에서 조선인 승객의 신분증을 요구
  • 젊은이들은
    작은 모임도 쉽게 허락받지 못함
  • 아이들 노랫소리에도
    “만세” 구호가 섞여 들릴까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유람선에서 터진 불씨

1932년 4월 어느 날,
평양 대동강 유람선에는
평범한 가족, 학생, 상인 등
수십 명의 조선인이 승선했습니다.

선상에서는
일본 순사가 승객들을 샅샅이 훑으며
“수상한 자는 없는지”
시선을 거칠게 보냅니다.

“왜 이런 조사를 자꾸 합니까?”

“우린 그저 강을 구경하러 왔을 뿐입니다!”

한 중년 남성이 항의하자
순사는 소리쳤습니다.

“조선인은 늘 의심받아야 한다!
시끄럽게 굴면 내리게 하겠다!”

분노의 기운이
서서히 배 전체에 퍼져갑니다.


저항, 그리고 봉기

한 젊은 학생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무시당해야 합니까?”

이어
몇몇 승객들이
함께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제 그만해라!”
“우리를 사람 취급도 안 하면서
돈은 왜 받나?”
“이 배는 조선의 배다!”

순사 한 명이
학생의 팔을 거칠게 붙잡으려 하자
근처에 있던 상인이
순사의 팔을 밀치고
학생을 보호합니다.

아수라장이 벌어지며
다른 조선인 승객들도
함께 순사들을 밀어내며 저항합니다.


강 위의 싸움, 평양으로 번지다

순사들은 무전을 쳐
강변에서 대기하던 경찰에게
즉시 지원을 요청합니다.

선상에서는
짧은 시간 동안
조선인과 일본인,
경찰과 시민이 뒤엉켜
고함과 몸싸움이 이어졌습니다.

“내 자식은 못 건드린다!”
“조선인도 인간이다!”

몇몇 승객은
강에 뛰어내려
헤엄쳐 도망쳤고
어린아이와 노약자는
선실 구석에 숨었습니다.


평양 시내, ‘유람선 봉기’ 소문이 퍼지다

유람선이 강변에 닿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일본 경찰이
조선인 승객들을 체포했습니다.

  • “주동자를 색출하라!”
  • “봉기자는 모두 연행!”
  • 학생, 상인, 남녀노소
    십여 명이 경찰서로 끌려감

평양 시내에는
“오늘 대동강에서 큰일이 났다”
“조선인들이 유람선에서 일본 순사를 쫓아냈다”
소문이 퍼져
사람들은
강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신문과 기록에 남은 파문

당시 <매일신보> <조선일보> 등에는
“평양 대동강 유람선 선상 소요”
“조선인 승객, 일제 순사에 집단 저항”
“경찰 대거 연행, 일제의 엄중한 탄압”
기사가 실렸습니다.

  • 경찰은
    주동자를 엄벌한다며
    고문·심문을 강행
  • 평양 기독교·학생단체는
    “억울한 시민을 석방하라”
    탄원서를 내기도 했습니다.

승객들의 침묵과 연대

연행된 조선인들은
“우린 모두 함께 저항했다.
누가 주동자인지 모른다”고
입을 맞췄습니다.

“내가 했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함께 했다.”

“조선 사람, 이제는
두려워만 하지는 않는다.”

이후 경찰의 조사에도
대부분은 경미한 처벌만 받았고
일부는
“노래를 크게 불렀다”는 이유로
수일간 구금됐습니다.


그날의 봉기가 남긴 것

유람선 봉기 사건은
당시 평양 시민과 조선인들에게
작지 않은 파장을 남겼습니다.

  • “이제 우리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
  • “작은 저항이라도 의미가 있다”
  • “강 위의 봉기는 평양 거리와 시장으로 번져야 한다”

    용기와 희망이 생겼습니다.

이후 평양 대동강 일대에서는
공개적 항의·집회가
잇따라 이어졌으며
일본 경찰도
이전처럼 쉽게
조선인을 억압하지 못하게 됐다는
후일담이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강 위에서 시작된
작은 목소리와 저항.

  • 평범한 시민,
    가족, 학생, 상인,
    그리고 그날의 아이들
  • 모두가
    “조선인도 사람이다”
    “우리에겐 자유와 존엄이 있다”

    몸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이름 없는 승객들의 용기,
그날 대동강 물결 위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나와 손을 꼭 잡고
강을 바라보며
‘언젠간 우리 강이
우리 것이 되는 날이 올 거다’
속삭였다.”

― 봉기 생존자 후손 구술


참고자료

  • 평양시사, 대동강사 자료집
  • 1930년대 조선일보·매일신보 기사
  • 항일운동사 연구 논문
  • 당시 경찰·헌병대 기록
  • 지역 구술·생존자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