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곤지의 붓끝에 깃든 독립의 뜻
― 평양기생조합의 비밀 독립자금 모금운동
“오늘 밤 공연은, 조선의 내일을 위해”
1920년대 어느 봄, 평양 대동문 밖.
기생 조합장 한복진(가명)은
공연 시작 전,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동료 기생들과 속삭였습니다.
“이번에도 수입의 절반,
남몰래 상자에 넣어둘 거야.
혹시 들키면 우리 모두 위험해.”
연지곤지, 비녀, 곱게 단장한 얼굴 뒤로
기생들은 서로의 손을 꼭 쥐며
“오늘 밤은,
돈만 버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도 조국을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걸
보여주자”고 다짐합니다.
기생, 예술과 저항의 경계
일제강점기 평양은
기생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 대동강변 유각(유흥·공연장),
- 대중 연희, 춤과 노래,
- 문인, 정치가, 상인, 청년 등이
모두 모여드는 공간.
기생들은
노래와 춤, 시조, 판소리,
그리고 연극까지
다채로운 예술로
민중의 삶과 슬픔,
저항과 희망을 노래했습니다.
평양기생조합의 조직과 자부심
평양기생조합은
한 해 수십, 수백 차례
대형 공연을 기획·진행하며
자율적인 조직 운영을 이어갔습니다.
- 공연 수입은
조합원 간 분배,
빈곤 기생 지원,
각종 행사·기부금으로 활용
조합장과 집행부,
유명 기생들은
“우리도 조선의 딸”
“민족의 아픔을 안고 노래한다”
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비밀리에 진행된 독립자금 모금
1920년대 중후반,
기생조합은
일제 경찰과 총독부 감시 속에서도
공연 수입 일부를
조용히 ‘독립운동 자금’으로 모으기 시작합니다.
- “이번 공연, 관람료 절반은
가난한 유족과 독립군에게 전달” - 조합 내 일부 집행부만
정확한 자금 이동 경로를 알고 - 공연장 매표소와 주점 수익 일부,
대외 기부금 등
다양한 경로로 비밀리 조성
기생들은
손님들의 호의·선물도
몰래 모아
‘민족학교 장학금’
‘독립군 위문금’
‘유가족 구호’ 등
형식으로 전달했습니다.
“우리 손끝의 돈, 독립의 불씨”
기생들은
매 공연 뒤 조합 창고에 모여
- 오늘의 수입 중 얼마를
‘희망 상자’에 넣을지 의논 - 상자엔
“나라 없는 딸의 눈물,
언젠가는 조국의 봄을 부를 것”
붉은 실로 수놓은
작은 보자기를 덮어두었습니다.
공연장이 적발·수색당할 때마다
돈을 급히 장독대, 장롱,
심지어 머리 비녀 속에 숨겨
밀사에게 건네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감시와 기생들의 위험
일본 순사와 밀정은
기생조합의 ‘수상한 모임’
‘공연장 수익금 일부 행방’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 “조합에 친일 인사가 섞여 있다”
익명 밀고도 있었고 - 몇몇 기생은
“민족운동 단체와 내통”
혐의로 체포·구금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기생들은
끝까지 자금 경로,
협력 독립운동가 명단을
누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공연장엔,
노래와 춤뿐 아니라
조선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당시 기생회 구술
공연장에 스며든 항일의 노래
기생들은
공연 때
항일 의지를 담은 민요,
서사시, 판소리를
한 소절씩
관객들에게 건넸습니다.
- ‘가시리’, ‘한오백년’,
민족의 슬픔을 담은 노래 - 당시 신작 시조,
은유로 일제 비판 - “새벽종이 울린다”
암시적 구호가
공연장에 퍼졌습니다.
손님들 중엔
청년 독립운동가,
평범한 시민,
비밀 연락책도 섞여
기생들의 눈빛과 노래,
손짓에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의 신호를 읽었습니다.
자금 전달의 치밀함과 여성 연대
평양기생조합은
여성 네트워크를 통해
서울, 원산, 만주,
상해 임시정부까지
비밀리에 자금을 전달했습니다.
- 일부 기생은
서울로 공연 초청받는 척
연락책을 직접 만나기도 - 조합원 동생,
친지, 단골 상인,
심지어 우체국 직원까지
연계해 송금망을 구축
“기생이란 이름 뒤에
숨은 또 하나의 이름,
조선의 딸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였다.”
신문과 구술에 남은 기록
1920~30년대 평양 지역 신문,
기생조합 회계장부,
해방 후 구술자료엔
“기생들이 공연 수입의 일부를
독립군, 유가족,
빈민 아동 지원금으로 전달”
“기생조합장, 항일운동 혐의로 구속”
등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
평양시·강서구 등
기생조합 출신 후손들은
“조상님이 실제로
독립군 자금 조달에
힘썼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전합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화려한 연지곤지,
고운 노래와 춤
그 속에 숨겨진
조선 여성의 강인한 연대와 저항.
이름 없는
수많은 기생들의
손끝에 모인 작은 돈이
결국 조국의 독립을
한 걸음 더 앞당겼다는 사실.
그들은 예술인이자
여성 연대의 선구자,
독립운동의 숨은 주역이었습니다.
“이름 없는 딸들의 작은 불씨가
조국의 봄을 밝힐 거라 믿었습니다.”― 평양기생조합 구술
참고자료
- 평양기생조합 자료집
- 독립기념관 구술·생활사
- 조선일보·매일신보(1920~30년대)
- 여성독립운동사 논문
- 평양 예술사·지역사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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